여행/산티아고순례길 돌담소담
33일차 순례길. 이제는 산티아고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실감나는 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오늘은 산티아고를 앞두고 100킬로 거리가 깨지는 날이었다. 사실 그런 것에 별 의미를 두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표지석을 앞두고 보여준 내 모습은 생각과는 많이 달랐다. 사리아에서 받은 인상이 썩 좋은 편은 아니어서 떠나는 마음이 편했다. 전날 신경쓰이던 것들도 길을 걸으면서 점점 털어버리게 됐다. 잠을 잘 못 잔 탓인지 졸면서 계속 걸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 산티아고까지 남은 일정을 얼마나 잡을지 생각해 봤다. 아마 4일이나 5일 정도? 처음엔 여유있게 5일 일정을 생각했는데 일단 오늘 걸으면서 정해보기로 했다. 자욱한 안개 속 아침길을 걷는 것으로 시작했다. 사리아를 빠져나갈 때도 안개가 많이 끼어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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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워 있는 침대로 밤새 밝은 가로등 빛이 정면으로 비췄다. 눈을 감아도 그 빛이 눈 속으로 들어와 환한 느낌을 받았다. 게다가 사모스의 숙소는 추웠다. 양말을 신어도 발이 시려웠고, 침낭 밑부분을 열어두면 찬바람이 온몸으로 술술 들어와 감기 걸리기 십상일 것 같아 침낭을 꼭 잠그고 잤다. 그러다보니 다리를 쭉 필 수 없어 답답했다. 눈부심과 추위, 몸의 불편함이 합해져 계속 뒤척이는 잠자리가 이어졌다. 잠을 얼마나 잤는지도 모르게 자고깨고를 반복했고, 결국 새벽에 일어나고 말았다. 더 자려고 하다 가만히 누워 앞으로 할 일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면서 구체적으로 생각이 정리되는 게 있었다. 잠을 못 자 깬 것이 이렇게 된 것을 보면 전화위복이라 해야 하나. 숙소를 나와 출발하려고 할 때 밖은..
지금까지의 순례길 중 가장 편안한 잠자리를 가졌다. 호텔 부럽지 않은. 역시 마음 편하게 있을 수 있는 곳이 최고인 것 같다. 덕분에 컨디션도 굿! 폰프리아에서 잘자고 일어나 준비를 하다보니 비교적 이른 출발을 하게 됐다. 아직 해 뜨기 전이었고, 주변의 모습도 이제 막 형체를 조금씩 드러내고 있었다. 마을을 벗어날 때쯤 날이 밝아지기 시작했고 어제에 이어 높은 지대에서 주변 풍경을 바라보며 나아갔다. 오늘은 내리막이 계속 되는 길이었다. 그래서 조금은 가벼운 마음이 들기도 했는데, 돌이켜보니 내리막을 계속 걸어서 다리에 무리가 갔을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추위도 있었다. 옷을 다 입었는데도 추위를 느낀 건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고산지대라 보니 확실히 기온이 낮은 느낌을 받았다. 첫 마을을 지나고 ..
30일째 순례길. 하루하루 충실히 걸으려고 하다보니 어느덧 한달이 되었다. 그만큼 시간이 지난 것이 잘 실감이 나진 않지만. 오늘도 도로를 따라 길을 시작했다. 전날과 다른 것이 있다면 비가 오지 않는다는 것. 아침에 날씨가 흐린 듯 했지만 곧 파란 하늘이 보였다. 이런 하늘을 본 지가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요사이 계속 비를 봐서 그런지 오랜만의 맑은 하늘이 반가웠다. 간만에 배낭커버와 우의도 집어넣을 수 있었다. 이번 여정은 마을 간 거리가 짧아서 여러 곳을 들릴 수 있었는데, 그 중 기억에 남는 마을은 두번째로 들린 곳이었다. 산 속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의 이름은 라스 에레이아스(LAS HERRERIAS). 마치 동화 속에 나올법한 아름다운 풍경을 지닌 마을이었다. 넓은 풀밭 위엔 말들이 자유로이 뛰..
오랜만에 여유 있는 아침을 보냈다. 알베르게가 사설이라 일찌감치 나가지 않아도 됐다. 일찍부터 준비하고 나가려는 사람들 때문에 분주한 느낌은 났지만 그들이 일찍 나가고 나니 조용해져서 좀 더 편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같은 방을 썼던 외국인 순례자 중 한 아줌마가 날 보고 반가워하길래 왜 그러지 싶었는데, 알고 보니 론세스바에스에서 출발할 때 내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던 사람이었다! 당시 누군가를 찍어준 건 기억나는데 그게 누구인지는 알 리가 있나. 그래도 그 얘기를 들으니 나 역시 무척이나 반가웠다. 그렇게 짧은 재회를 하고 그녀는 무리와 함께 먼저 떠났다. 가볍게 아침을 챙겨 먹고 나서 숙소를 나섰다. 어제 동네를 둘러보지 못해서 다는 못보더라도 주요 포인트는 보고 가기로 했다. 밝을 때 본 비..
지금은 다음날 새벽 5시 반. 이미 5시 전에 깨서 밖으로 나와 있었다. 알람이 울리기 전에 깼는데, 손등이 자꾸 가려워서 그랬던 것 같다. 잠결에 긁고 있는데, 문득 거기는 가려웠던 적이 없는 곳이라는 걸 알았다. 갑자기 잠이 달아났고, 일어나서 보니 오른손 등에 모기 물린 것처럼 두 곳이 크게 부풀어올라 있었다. 그런데 왠지 모기는 아니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베드버그?! 아, 나는 안 물릴줄 알았는데 정녕 이렇게 물린 것인가... 이미 이삼일 전부터 발등부터해서 손등의 노출된 부분에 빨간 반점처럼 보이는 것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엔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계속 더 생기는 느낌이 들었고, 간지럽기도 한 것을 보면 아무래도 내가 방심을 한 것 같다. 증상이 나타났을 때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
엘 아세보의 숙소에서 눈을 떴을 때 하늘은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고, 오늘도 비가 올 것 같다는 생각에 그에 대비한 준비를 단단히 하고 나섰다. 전날 젖은 신발은 아직 축축해서 신자마자 양말이 금방 젖었다. 그렇게 나선 이번 순례길은 축복의 시간이 되었다. 비가 조금씩 오다말다 하기는 했지만 오전 중에는 거의 내리지 않았고 어제 비가 와서 만들어진 구름과 안개들이 햇빛과 어우러지면서 레온산맥을 멋지게 수놓고 있었다. 머물렀던 곳이 산 위쪽이어서 거기로부터 내려가며 산맥의 모습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감탄에 거듭된 감탄. 보이는 풍경마다 포토존이 되어 걷는 속도가 도무지 나지 않았다. 첫번째 들린 마을은 여전히 산 속에 있었다. 허름해보이는 초입을 지나가자 예쁜 휴양지 느낌의 마을이 나타났다. 마을을 ..
잠을 자며 하룻밤 보냈지만 이름이 어려워 잘 기억나지 않는 마을을 떠나 오늘의 순례길을 나섰다. 아침부터 잔뜩 흐린 날씨가 계속됐다. 첫번째로 도착한 마을은 전날 머물렀던 곳보다 더 오래되어 보였다. 입구에는 돌담이 늘어서 있었고 대부분의 건물이 낡았는데, 그것이 오히려 정겨운 느낌을 줬다. 다음으로 도착한 마을은 오르막이 인상적이었는데, 브런치를 먹으려 식당을 찾다 마땅한 곳이 없어 작은 슈퍼에서 빵과 주스를 사서 허기를 채웠다. 마을을 막 벗어날 즈음 날씨가 점점 어두워지더니 비가 한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바로 가방을 비닐커버로 씌우고 우의를 꺼냈다. 그러자마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굿 타이밍!). 우의를 걸쳐입고 다시 걷기 시작하여 도착한 곳은 포세바돈이란 마을. 여긴 집들이 부서져 있는 곳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