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8시에 시작한 순례길의 하늘은 아직 어스푸름했다. 곧 해가 뜨려는 듯 보였고 마을을 막 벗어날때 쯤 뒤를 돌아보니 멀리서 조금씩 붉은 기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와 반대로 앞쪽에는 안개가 짙게 끼어 눈앞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뿌했다. 이런 안개를 본 적이 언제였던가... 안개 속에서 걷다보니 어렸을 적 안개가 뿌옇게 낀 논밭을 걸었던 기억이 났다. 신비롭고 설레었던 느낌이 다시 피어오른다.

 

 

그렇게 걷다 문득 뒤를 보았다. 해가 안개 속에서 점점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몹시 인상적인 풍경에 홀린 듯 바라보다 마침 같은 숙소에서 머물렀던 순례자 아저씨를 만나서 그에게 사진 한장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사진을 찍은 그는 한번 보라고 했고 난 풍경을 담은 것만으로도 기꺼워 대충보고 집어 넣었다. 나중에 사진을 확인해보니 생각보다 괜찮아서 무척이나 맘에 들었다. 아저씨, Glacias!

 

 

한참 동안 끼었던 안개는 어느 구간에 접어들면서 사라지고 파아란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늘을 바라보며 조금씩 올라가보니 넓은 들판이 나왔다. 주위의 풍경은 어제와 같은 잿빛과 회색빛이 대부분이었지만 마음이 좋다보니 모든 게 아름답게 다가왔다.

 

 

급내리막길이 나와 걷고 있는데, 분지 같은 지형에 둘러싸인 마을이 하나 보였다. 온따나스였다.

 

온따나스
온따나스

 

그릇에 예쁘게 담은 듯한 마을, 온따나스. 처음 들른 곳은 마을 구석의 어느 바였다. 여기서 처음으로 하몽이 들어간 빵을 시켰다. 짭짤한 하몽이 빵과 잘 어울렸다. 바 옆에는 아구아(물)도 받을 수 있었는데, 물맛이 무척이나 좋았다.

 

 

마을을 둘러보다 성당을 발견했다. 거기에서 오랜만에 스탬프를 찍을 수 있었고, 그 옆에는 물건들이 몇 개 놓여있었다. 한국어로 된 설명도 있어 반가웠다. 사람 없이 기부제로 운영되고 있는 이곳에서 '대주교의 십자가'라 쓰여 있는 기념품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엔 나와 별 상관이 없으니 그냥 가려고 했는데, 왠지 하나 정도 가지고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거에 관심 있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기부금을 놓고 십자가를 하나 집어들어 성당을 나오는데 잘 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온따나스를 떠나 한참을 걷다가 초록빛이 보이는 나무와 땅을 만나게 되었다. 아주 선명하고 싱그러운 초록빛에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풍경이 끝나는 지점에 누가 차를 세워두고 부르길래 보니 웬 아저씨가 스탬프를 찍어주겠다는 것이었다. 여기서는 원래 그렇게 해주는가보다 하고 스탬프를 받고, 또 문양이 새겨진 나무조각도 하나 주길래 좋아했는데 갑자기 기부금을 달라고 하는 게 아닌가. 얼떨결에 동전을 뒤적이다 얼마간의 돈을 주고 길을 나섰다. 그런데 갑자기 그렇게 돈을 준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면서 당한 기분이 들었다. 원래 스탬프는 정해진 장소에서 그냥 받을 수 있는 건데... 좀 씁쓸하기도 했지만 그 아저씨도 그렇게 먹고 사는 거겠지 하면서 애써 위안을 했다는.

 

이제 구간은 여러 갈래의 길이 하나의 아스팔트 도로로 합쳐졌다. 도로 양 옆에 예쁜 나무들이 쭉 이어져 있는 걸 보고 있으니 차들이 쌩쌩 달렸음에도 기분 좋게 걸을 수 있었다.

 

그렇게 가다가 수도원 건물을 만났다. 그런데 음악이 크게 들리길래 뭔가 싶었는데 어떤 아저씨가 운영하는 가게에서 틀어놓은 것이었다. 어쩐지 수도원에서 너무 경쾌한 음악이 나온다 했지.

 

 

수도원을 지나 조금 가다보니 까스뜨로헤리스의 모습이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거기서 약간 힘들기 시작했는데, 도로 위라 마땅히 쉴 데가 없어 잠깐 배낭을 내려놓은다음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쭉 걸어 까스뜨로헤리스에 도착했다. 오후 두시가 채 안되는 시간이어서 더 갈지 고민을 하다 오늘은 일찍 자리잡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 머물기로 했다. 

 

까스뜨로헤리스
까스뜨로헤리스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알베르게를 찾아 돌아다니느라 한시간 가까이 걸린 것이다. 기부제인 줄 알았던 곳이 돈을 받는다고 하자 일단 다른 곳으로 가봤는데 그곳을 찾느라 이리저리 헤매었고, 막상 도착하니 문이 열리지 않았다. 허탈했지만 거기서 마을 구조가 잘 표시된 지도를 발견할 수 있어서 그것을 보고 처음 들렀던 알베르게로 돌아갔다.

 

 

막상 들어가니 생각보다 괜찮았고 침대도 한산한 편이었다. 샤워시설도 전날과 달리 잘 되어있어서 만족스러웠다. 단지 파리떼들이 계속 달라붙어 신경이 쓰이는 정도? 일찍 도착해서 빨래도 강한 햇살에 금방 말릴 수 있었다. 아직 한낮의 스페인 태양은 뜨겁다.

 

여기 마을은 규모가 꽤 됐는데, 들어올 때는 시에스타 시간이어서 그런지 정말 조용했다. 숙소에서 볼일을 마치고 나오니 가게에서는 음악 소리가 들렸고, 사람들이 식사하는 모습도 보이는 등 조금은 시끌벅적해졌다. 마을을 돌아다니다 상점을 발견하고 필요한 것을 사고 간식거리로 산 빵과 주스를 흡입하듯 먹었다. 배가 많이 고팠나보다.

 

 

이제 순례길도 중반부에 들어선 느낌이다. 발상태가 호전되어 걷는 데 속도가 붙었고 생활도 익숙해지고 있다. 이런저런 일들도 생기지만 순간순간을 충분히 즐기도록 해보자. 내일의 순례길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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