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정의 날씨도 맑음맑음! 숙소에서 빨리 나가라는 눈치가 없어서 여유롭게 출발을 했다. 마을에서 나갈 때 잠시 헤매다 방향을 제대로 잡았다. 마을을 막 벗어나려는 순간 등 뒤에서 붉은 기운이 확 느껴졌다. 돌아보니 태양이 형체를 점점 온전히 갖추면서 떠오르고 있는 것이었다. 잠시 그 광경을 지켜보다 오늘의 순례길을 시작했다.

 

 

도로 옆의 길을 나란히 걷다 문득 지금 걷고 있는 내 모습을 찍고 싶어졌다. 마침 옆을 지나가는 순례자 아저씨에게 사진찍는 걸 요청했고, 그는 흔쾌히 뒤에서 내가 걸어가고 있는 연출샷(!)을 찍어줬다. 예전부터 한번 찍어보고 싶었는데 드디어 이렇게 찍게 된 것. 

 

 

찍은 것을 건네받고 그와 나란히 걷다가 얘기를 나누게 됐다. 그는 프랑스에서 온 필립이었고 나이는 55세. 휴가기간 동안 레온까지 걸으러 왔다고 했다. 사실 잠깐 얘기하고 헤어질 줄 알았는데 계속 얘기를 나누게 됐고, 한국과 프랑스에 대한 이야기를 서로 유창하지 않은 영어로, 때론 떠듬거리며 주고받았다.

 

다 알아들은 건 아니었으나 대강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고 나도 얘기가 계속 하고 싶었는지 다음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 함께 걸었다. 그렇게 얘기를 하다보니 1시간 정도의 시간이 안 느껴질 정도로 금방 온 느낌이었다. 

 

함께 걸었던 구간은 건너뛴 것처럼 어떤 풍경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마치 편집된 것처럼. 제대로 둘러보지 못해 아쉬운 느낌도 있었지만 재밌게 대화를 할 수 있어서 그것으로 족했다.

 

첫번째로 들린 마을에서 난 좀 둘러보고 간다고 했고 필립은 천천히 가고 있겠다고 했는데 그후론 보지 못했다. 언제 또 만날 수 있을까? 이후 구간부터는 원래 걷던 대로 갔다. 온전히 길을 즐기는 데는 역시 홀로 걷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걷다가 이번에도 군락을 보게 되었다. 소나무가 아닌 다른 종의 나무들이 작은 숲을 이루고 있었다. 나란히 종과 횡으로 쭉 이어져있는 숲. 가까이 가보니 꽤나 아름다웠고 잠시 그 모습을 감상했다. 그러고 보니 숲을 볼 때마다 늘 좋고 잠깐씩이라도 멈춰서 그 모습과 느낌을 느끼곤 한다. 이쯤되면 숲성애자라고 불러야 할라나.

 

 

그렇게 잠시 있는데, 이쪽으로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순례길에서 몇번 마주쳤던 스페인 3인방 아저씨들이었다. 서로 반갑게 인사하며 어디까지 가는지 물어봤다. 내가 산티아고까지 간다고 하니 불타는 청춘(!)이라고 얘기를 해준 것 같다. 그들은 레온까지 간다고 했다.

 

 

유쾌한 그들이 먼저가고 감상을 마친 나도 다시 걷기 시작했다. 슬슬 배가 고파왔고, 두번째로 들린 마을에서 빵을 꺼내 허기를 달래고 출발했는데 그때부터 불청객이 등장했다. 그건 바로 파리떼들! 어디서부터 온건지 모르지만 파리 몇 마리가 끊임없이 따라와 얼굴에 붙고 윙윙거리며 영 성가시게 했다. 

 

부르고스를 지나 메세타 구간에 들어오면서 파리들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 같다. 특히 더운 시간때 모습을 나타냈는데 이 지역이 다른 곳에 비해 좀 더럽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쨌거나 파리녀석들을 계속 보고 싶지는 않았다. 날이 점점 더워지면서 걸음도 조금씩 빨라졌다.

 

 

어느덧 정오가 넘었다. 잠깐 쉬기 위해 들린 마을에서 브런치로 애플케익과 주스를 먹었다. 양은 차지 않았지만 처음 먹어보는 애플케익의 달콤한 맛에 기분이 좋아졌다.

 

 

이제 목적지인 까리온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여기부터 구간은 도로 옆을 지나는 길이었다. 6킬로 남았다는 표지판이 나왔다.

 

 

오르막을 넘자 점점 까리온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제법 큰 마을이라는 생각을 하다가 가까이 다가갈수록 마을보다는 도시에 가까운 느낌을 받았다. 까미노의 중심부라 불리는 까리온. 역시 뭔가 다른 건가.

 

까리온
까리온

 

진입로에 들어섰을 때 막 학교가 끝났는지 학생들이 우르르 내려와 버스를 타고 있었다. 그 무리를 지나가며 학생들에게 인사도 하고 그들의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시내로 들어와 숙소를 어디로 잡을까 생각하다 성당에서 운영하는 곳으로 가기로 했다(이곳은 마리아 수녀님이 운영하는 곳인데, 나중에 심상정 의원이 '나의 외사친'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순례길에 참여해 며칠간 머무르면서 유명해진 곳이기도 하다).

 

까리온-알베르게
까리온 알베르게

 

그곳에 도착했을 때 익숙한 얼굴의 제프와 함께 한국인 남자가 등록을 하고 있는 게 보였다. 나도 등록을 하고 알베르게의 정보를 설명들은 후 짐을 풀면서 한국인 순례자와 얘기를 나눴다. 그는 자전거를 타고 여행하고 있었고, 이미 8월부터 북유럽을 시작하여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흥미로워서 나중에 저녁을 먹으며 더 얘기를 나누자고 했다. 7시에 만나자고 약속을 한 후 동네탐방에 나섰다. 

 

역시 도시라 느껴질만큼 넓기도 하고 둘러볼 곳도 많았다. 성당만 세 곳이 있었는데, 하나씩 살펴보며 둘러보다보니 2시간 가까이 시간이 흘렀다. 마지막 성당 근처에는 강이 있었는데, 나무숲과 강이 어우러진 풍경은 무척이나 예뻤다. 돌아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구경하다보니 저녁 6시가 넘었고 마트로 발길을 옮겼다. 가서 필요한 장을 보고 숙소에 돌아갔는데, 그곳에는 낮에 본 사람 외에 또다른 한국인 둘이 같이 있었다. 다 한번씩은 본 얼굴들이었다. 한명은 순례길에서 몇 번 얼굴을 마주쳤던 사람이었고, 또 다른 이는 무리지어 다니는 사람 중 한명이었다. 

 

순례길을 마치고 저녁을 먹을 때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면 좋겠다는 것이 이렇게 실현이 됐다. 그런데 막상 함께 모여 있는게 달갑지만은 않았다. 예정에 없던 사람들과 함께 자리에 한 것도 그랬지만 얘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여자 순례자 중 한명이 자기 얘기만 주구장창 늘어놓는 모습에 그 자리가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말수가 줄고 나중에는 가만히 듣게 되었는데 얘기가 잘 들어오지는 않았다.

 

게다가 또다른 여자 순례자가 속한 무리는 밤늦게 음식을 해먹었는데, 밤 10시가 넘어서까지 크게 떠들고 계속 왔다갔다하면서 다른 순례자들에게 민폐를 끼치기도 했다. 그 일을 겪고 다니 그들에 대한 인상이 안 좋아졌고 다시 안 만났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오늘 원하는 자리가 만들어졌지만 막상 그에 대한 만족도는 크지 않았다. 이를 통해 인생이란 원하는 대로 된다고 좋은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기도 했다. 그렇다고 한국인 순례자들과 함께 한 자리가 불쾌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각자가 순례길을 다니면서 느낀 다양한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접하면서 느끼는 것들도 순례길에서 겪을 수 있는 경험이니까.

 

 

까리온에서 보낸 시간은 다양한 것들을 경험할 수 있게 해주었다. 멋진 풍경과 모습들을 담았고 새로운 사람을 알게 되었다. 또 함께 저녁시간을 보내며 얘기를 나누었고. 모든 시간이 다 좋았던 것은 아니었어도 그 자체만으로도 배울 게 있고 의미 있는 시간들이었다. 우연스럽게 생기는 일들도 즐겨보면서 앞으로도 까미노의 모든 것들을 느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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