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찌감치 일어나 준비는 했는데 나갈 때 시간을 보니 8시가 다 되었다. 이것저것 챙기고 발 구석구석에 바셀린도 꼼꼼히 바르다보니 시간이 많이 흘렀나 보다. 제일 먼저 일어났는데 나간 것은 거의 마지막이었다. 밖은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였으니 아마 그 전에 준비를 마쳤어도 비슷하게 나갔을 것이다.

 

 

어슴푸레한 풍경의 순례길에는 이미 많은 행렬이 이어져 있었다. 매번의 모습이 다른 것도 순례길을 걷는 재미 중 하나다. 하지만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어서 그런지 뒤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길을 걷는 데 불편함이 느껴졌다. 길을 온전하게 느끼는 데 방해가 된 느낌이랄까.

 

 

이럴 때는 방법이 있다. 의도적으로 천천히 걷는 것이다. 저렇게 얘기하며 걷는 사람들은 보통 빨리 걸어간다. 얘기하는 데 정신이 팔려서 어떻게 걷는 지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얘기하는 무리들을 먼저 보내고 다시 평화로움을 되찾았다.

 

 

이번 순례길도 날 실망시키지 않았다. 넓게 펼쳐진 포도밭 그리고 드넓은 들판이 마음을 탁 트이게 해 주었다.

 

 

휴식을 취하려고 도중에 잠깐 신발을 벗고 쉬고 있었는데 한 부부가 다가왔다. 덴마크에서 온 부부였다. 내가 신발을 벗고 있는 것을 보고 발이 아파보였는지 가지고 있던 밴드를 주려 했다. 밴드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호의가 고마워서 받았다. 나중에 걷다가 또 만났을 때 같이 사진을 찍자고 했다. 순례길에서 함께 찍은 첫 사진이었다.

 

발의 통증은 길을 걸을 때부터 있었는데 밴드를 붙였음에도 여전히 통증이 계속됐다. 이미 물집이 잡힌 쪽을 피해 걷다 보니 다른 부위에 또 물집이 생긴 것 같았다. 그래도 아픈 것보다 길을 걸으며 보는 풍경이 더 좋았다.

 

 

그렇게 걷다가 한 순례자가 말을 걸어왔다. 슬로베니아에서 온 중년의 남자였다. 매끄럽게 소통이 된 것은 아니었지만 조금씩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한동안 함께 길을 걸었다. 그러다 서로의 속도가 달라지면서 자연스레 헤어지게 되었다. 로그료뇨로 간다고 했으니 속도를 빨리 내서 간 것 같았다. 그 후로 또 보지 못했고, 헤어질 때 제대로 인사를 못한 게 마음에 좀 걸리기도 했다.

 

 

아침부터 날이 흐리더니 가는 비가 오락가락하기 시작했다. 은근히 젖는 느낌에 배낭커버를 꺼내어 배낭을 덮었다. 처음으로 꺼낸 본 것이었는데 덮은 모양이 마음에 들었다. 별걸로 다 기분이 좋아지기도 한다.

 

다행히 비는 더 오지 않았고 정오가 넘어갈때 쯤 햇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금 더 걷다보니 제법 규모 있는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비아나였다.

 

비아나
비아나

 

비아나에 도착했을 때의 시간은 오후 1시 경. 원래 비아나를 오늘의 목적지로 생각을 했는데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다. 더 가야하나 망설여졌다. 이렇게 일찍 들어와 본 적이 없기도 했고 여기서 마치기에는 시간이 좀 이른 것 같기도 했다. 10킬로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도시인 로그로뇨가 있었고, 마음만 먹으면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비아나에서 머물기로 했다. 일단 마을에 들어왔을 때 활기찬 분위기가 좋았고, 무엇보다 물집 잡힌 발의 통증이 심했기 때문에 일찍 쉰다는 마음으로 숙소를 잡기로 했다. 

 

 

기부제로 운영되는 곳이 문이 잠겨 있어 공립 알베르게로 발길을 옮겼다. 그런데 가격이 알고 있던 것보다 비쌌고 침대시트덮개까지 돈내고 사야 하는 게 아닌가. 이것 역시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어서 왠지 억울했지만 덮개가 필요한 상태였기에 어쩔 수 없이 구입을 했다.

 

샤워와 빨래를 하고 나니 시간은 3시 정도. 밖은 여전히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고 있었다. 여유가 생기면서 마음도 절로 한가로워졌다. 슬슬 밀려오는 허기에 마을 구경도 할 겸 먹을 곳을 찾아 나갔는데 아까 열려 있었던 상점들이 문을 닫은 게 아닌가. 그때 번뜩 시에스타가 생각났다. 일찍 도착하니 말로만 듣던 시에스타를 몸소 실감하게 된 것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이야기 <10>

시에스타(Siesta)는 점심을 먹은 뒤 잠깐 자는 낮잠을 의미하는 스페인 문화다. 지중해 연안 국가와 라틴계 국가에서 주로 시행한다. 유럽에서는 스페인과 그리스, 남미에서는 멕시코와 아르헨티나가 대표적이다. 시에스타를 하는 이유는 한낮의 기온이 너무 높기 때문이다. 특히 여름철 한낮의 기온이 40도 넘게 올라가기도 하므로 이 시간에 무리하지 말고 쉬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시에스타 시간은 나라마다 다르며 이 때는 상점이나 음식점들이 대부분 문을 닫는다. 이 시간이 지나고 뜨거운 기운이 가시고 나면 다시 문을 여는 것이다. 스페인의 경우,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 같은 대도시를 제외하고는 조금만 지방으로 나가면 시에스타를 여전히 적용하고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있는 대부분의 마을도 마찬가지다. 

 

 

다행히 아직 열려 있는 가게가 있어서 그곳으로 들어가 까르보나라를 시켰다. 이 곳의 까르보나라는 어떤 맛일까 궁금했다. 이윽고 나온 까르보나라는 겉모습은 비슷했지만 그 특유의 느끼한 크림맛은 거의 없고 신맛이 강하게 났다. 원래 그런 건지 아님 소스가 상한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맛은 좀 의심스러웠지만 배가 고팠기 때문에 남김 없이 싹 비웠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빵과 음료도 사서 먹었다. 그제야 만족스러움을 느끼며 숙소로 돌아갔다. 

 

 

숙소에서 쉬다가 해가 저물 무렵 밖으로 나왔다. 근처 언덕으로 올라가니 바깥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저멀리 붉은 빛의 노을과 구름이 그림 같은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오자 하나둘씩 불이 켜지며 마을은 또다른 모습을 나타냈다. 마을 너머 멀리 떨어진 곳에 넓게 펼쳐진 불빛을 보니 저기가 로그료뇨인가 싶었다. 큰 도시여서 멀리서도 저렇게 잘 보이는 건가.

 

 

어둠과 불빛으로 둘러싸인 마을의 모습을 감상하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숙소로 가는 길 곳곳에 켜진 불빛 그리고 그 불빛에 비친 골목의 모습은 고풍스러움을 풍기며 이곳이 유럽임을 다시 한번 실감케 했다.

 

 

비아나에서의 밤은 이렇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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