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산티아고 순례길에 접어든 지 10일차. 오늘은 나바레떼에서 나헤라까지의 여정이다. 안내서에 따르면 지금까지의 순례길 중 가장 평탄한 구간이면서 시간도 적게 걸리는 길이다. 그래서인지 여느때보다 많이 늦은 9시가 넘은 시각에 출발을 하게 되었다. 이게 가능했던 것은 전날 머무른 곳이 사설 알베르게였기 때문에 체크아웃 시간이 공립처럼 이르지 않았던 덕분도 있었다.

 

 

잠을 잘 잔 편이어서 컨디션은 좋았는데, 발에 여전히 통증이 있어 천천히 걷기로 했다. 늦게 출발해서 그런지 주변에 걷는 순례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고요한 길 위에서 저벅저벅 내 발소리를 들으며 걷는 느낌도 나름 괜찮았다.

 

 

다음 마을인 벤또사로 가는 길 옆에는 고속도로가 길게 나 있었다. 그냥 걷기엔 심심해서 노래를 흥얼거리다 나중에는 큰 소리로 불렀다. 주변에 사람도 없을 뿐더러 쌩쌩 지나가는 차소리에 내 목소리가 묻혀 마음놓고 노래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그렇게 걷다보니 발의 아픔도 어느새 잊어버리게 됐다.

 

 

 

고속도로 구간이 꽤나 길었기에 중간에 잠깐 쉬고 있었는데 뒤쪽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오는 게 보였다. 처음에는 이렇게 늦게 출발하는 사람들도 있구나 싶다가 그 전 마을에서 출발했더 사람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걷기 시작했을 때 흐렸던 하늘이 점점 개면서 파란 빛을 띠기 시작했다. 파란 하늘 아래의 풍경은 바라만 봐도 좋았다.

 

 

곧 도착한 아담하고 조용한 마을 벤또사를 한바퀴 둘러보고 성당 옆 쉼터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했다. 눈을 감고 바람소리와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에 가만히 귀기울이고 있으니 마음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이대로 계속 있어도 좋겠다 싶을 정도로.

 

 

벤또사를 나와 걷기 시작했을 때 눈 앞에 펼쳐진 모습은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게 만들었다. 끝없이 펼쳐진 포도밭도 아름다운 풍경에 빠지는 데 한 몫 했다.

 

 

그러다 문득 신발끈을 좀 느슨하게 매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끈을 조절하고 나니 전보다 발이 훨씬 편해졌다. 이때부터 걷는 속도에 탄력이 붙었고 바람도 순풍으로 불어줘 그 어느때보다 빠른 걸음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런데 바람에 모래가 많이 섞여 있어 걷는 내내 온몸으로 모래를 뒤집어 쓸 수 밖에 없었다. 하, 모든 게 좋을 순 없는 건가. 그래도 덕분에 오히려 속도를 더 내서 빨리 가게 된 것도 있었다. 

 

어렴풋이 제법 큰 마을의 형태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헤라였다. 그런데 한참을 걸어가도 쉽사리 다다르지 못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갑자기 도시가 짠하고 나타났다.

 

나헤라
나헤라

 

이곳은 순례길과 마을의 경계가 명확한 느낌은 아니었다. 그렇게 모습을 보인 나헤라에서 머물 숙소를 찾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한시간 가까이 걸려 겨우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헤라-알베르게
나헤라 알베르게

 

나헤라에서 머물게 된 숙소는 기부로 운영되는 알베르게였다. 독특한 것은 하나의 공간에 모든 침대가 들어가 있다는 것! 거의 체육관만한 크기의 공간에 수많은 침대들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랑 나란히 잘 수 밖에 없는 형태라 어색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런 데서도 한번 자보는 거지 하며 자리를 잡고 짐을 풀었다.

 

빨래와 샤워를 마치고 숙소를 나섰다. 먼저 찾은 건 현금인출기. 수중의 현금이 어느새 다 떨어져 있었다. 처음 외국에서 인출기를 사용해 보는 것이기도 하고 좀 더 수수료가 적게 나오는 인출기를 찾다 보니 세 군데나 살펴보게 되었다. 그런데 나중에 살펴보니 수수료가 그렇게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지는 않더라.

 

 

 

인출을 하고 나서 주변을 살펴보고 있는데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나헤라에 들어올 때 미리 봐둔 마트로 얼른 이동하여 필요한 것들을 샀다. 큰 마트라 그런지 볼거리가 많았고 장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숙소에 돌아오니 많은 사람들이 로비에 나와 있었다. 요리하는 사람에 이야기 나누는 사람들까지 많은 사람들이 한데 엉켜 분주했다. 

 

한쪽에 앉아 마트에서 사온 음식을 꺼내어 먹고 있는데 옆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 중 익살스런 아일랜드 아저씨 숀이 가져온 포도주를 따라주기도 했다. 서로 얘기가 막 통하지는 않았지만 함께 하는 느낌만으로도 좋은 시간이었다.

 

도시라 불릴만한 규모를 갖추고 있으면서 한편으론 어딘가 쓸쓸한 정취가 느껴졌던 나헤라에서의 밤은 그렇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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