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순례길 전체 일정 중 유일하게 빽도(!)를 하게 되었다. 혼란과 좌절, 기쁨과 환희가 뒤섞인 6일차 순례길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본다.

 

간밤에 잠자리가 좋지 않았다. 위층에 자고 있는 사람이 계속 뒤척여 일찌감치 잠에서 깼다. 일어난 김에 일찍 나갈 생각으로 준비를 마치고 보니 아침 7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숙소 밖으로 나와보니 낯설지 않은 순례자가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어제 잠깐 인사를 나눈 마카오에서 온 순례자였다. 그렇게 얼굴을 본 것으로 자연스레 같이 길을 떠나게 됐다. 순례길 들어 첫 동행이었다.

 

 

밖은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어두컴컴했다. 에스떼라가 꽤 규모가 있는데다 주변이 잘 보이지가 않으니 빠져나가는 길을 찾는데 애를 먹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굳이 불을 켜지 않아도 어둠 속을 걷는 기분은 밝을 때 걷을 때와는 또 달랐다.

 

 

하늘 저편에서부터 조금씩 밝아지는 것이 보였다. 어두웠다 조금씩 밝아지는 하늘의 모습은 장관이었다. 순전히 자발적으로 일찍 나온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멋진 풍경을 볼 수 있었으니 때로는 흐름에 따라 길을 떠나 보는 것도 좋은 일이다. 다만 컴컴해서 주변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은 아쉬웠고, 역시 날이 밝아진 후 길을 나서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스떼라에 거의 붙어있다시피한 아예기로 들어갈 때도 여전히 주위는 깜깜했다. 아예기를 지나 이라체를 가리키는 표지판을 볼 때쯤 날이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했다. 곧 웅장한 성당 건물이 나왔다. 어두워서 형체가 잘 보이지는 않았는데, 그저 마을 근처의 성당이겠거니 하면서 지나쳤다. 이곳이 이라체 수도원인지는 생각도 못한 채...

 

 

조금 가다보니 갈림길이 나왔다. 오늘 목적지로 생각하고 있는 로스 아르꼬스로 가는 길이 두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안내서에는 한 쪽길에 대한 설명만 나와 있었는데, 두 갈래 길이 나와버리니 조금 고민이 됐다. 결국 마음이 가는대로 다른 쪽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 길은 계속 오르막으로 되어 있었고 산을 지나가는 길이었다. 아직 물집 잡힌 곳이 낫지 않아서 울퉁불퉁한 비탈길을 오를 때 발의 욱신거림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래도 이 길은 풍경이 끝내주게 좋았다. 일단 숲이 많았다. 숲길을 걸으며 상쾌한 기분을 오래 즐길 수 있었다.

 

 

점점 높이 올라가면서 멀리 거대한 돌산도 볼 수 있었는데, 마치 병풍처럼 이어져 있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호연지기마저 느껴지는 풍경이었다.

 

 

이렇게 보이는 풍경은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의심과 불안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오늘 순례길에서 가장 기대가 되는 곳이 있었는데, 그곳은 바로 이라체 수도원이었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이라체 수도원 안에 있는 와인 수도꼭지였다.

 

 

산티아고 순례길 이야기 <9>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면서 만나는 몇몇 유명한 명소들이 있다. 소위 핫플레이스라고 할 수 있는 곳인데, 이라체 수도원도 그 중 하나이다. 이곳이 유명해진 이유는 수도원 안에 있는 와인 수도꼭지 때문.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아닌 와인이 나온다. 그것도 콸콸! 아마도 이곳을 지나는 순례자들을 위해 수도원에서 제공하고 있는 서비스인 것 같다.

와인을 담을 수 있는 용기만 있으면 누구나 와서 먹을 만큼 담아갈 수 있다. 사람이 많을 때는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니까 욕심부리지 말고 1인당 1통만 받는 매너가 필요하다.

 

 

안내서에는 에스떼라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이라체 수도원이 나와 있다고 되어 있었다. 그런데 갈림길에서 산길로 들어선 이후 수도원이 나올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설마 지나친 것인가 싶기도 했지만 오전에 잠깐 봤던 성당 빼고는 아직 나온 것이 없었다. 벌써 산길을 걸은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 수도원이 나오지 않아 초조한 마음이 마음 한켠에 계속 있었다.

 

 

그렇게 산 길을 걸은지 3시간 여, 드디어 건물이 보였다. 그곳은 로키스라는 작은 마을이었다. 마을로 들어서자마자 수도원 건물을 찾았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봐도 수도원이라고 볼 만한 건물은 보이지 않았다. 와인수도꼭지도. 그제서야 이라체 수도원을 지나쳐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아침에 잠깐 스쳤던 그곳이 바로 이라체 수도원이었다는 것도.

 

 

순간 너무 억울한 생각이 들었고, 마침 지나가는 순례자에게 와인 수도꼭지를 봤냐고 물어봤다. 그는 당연히 지나오면서 봤고, 자기 통에 와인을 받아왔다고 얘기를 해주었다. 사진까지 보여주면서.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오늘 순례길은 그 와인 수도꼭지를 보는 게 주 목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이렇게 기대가 무너져 버리다니... 이대로 못보고 그냥 가버릴 수는 없었다. 그때까지도 와인수도꼭지가 어디에 있는지는 정확히 몰랐지만 수도원 근처 어딘가에 있겠지 하면서 되돌아갈 결심을 바로 했다.

 

마카오 친구는 그 수도원이 우리가 가지 않았던 갈림길의 다른 쪽에 있었을 거라는 대단한 착각을 아직까지 하고 있었다. 사실 그 친구는 와인 수도꼭지에는 별 감흥이 없어보였다. 로키스까지 그래도 적지 않은 시간 동행을 하며 왔는데 그것도 여기까지였다. 그 친구는 다시 가던 길을 계속 가고, 나는 이라체를 향해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은 찾기도 만만치 않았다. 길을 안내해주는 표시는 대부분 산티아고로 가는 방향으로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방향을 보고 역순으로 가면 되겠지 생각했지만 갈림길이 많아서 헷갈렸다. 오는 순례자들을 보고 방향을 잡기도 했는데 어느 시점부터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아픈 발을 이끌고 기억과 감에 의존하며 걸었다. 쉬고 싶기도 했지만 그보다 빨리 가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했기에 이를 악물고 걸었다. 끝에 와서는 빙 돌기도 했지만 무사히 이라체 수도원까지 갈 수 있었다.

 

이라체-수도원
이라체 수도원

 

도착해보니 역시나 아침에 봤던 그곳이었다. 주변을 살펴보며 와인 수도꼭지를 찾았다. 수도원 주변에는 아무리 찾아봐도 없길래 지나가던 사람에게 물어보니 수도원 들어오기 직전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발견한 수도꼭지를 보니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허탈함도 있었지만 그래도 기쁨이 앞섰다.

 

이라체-수도원-와인-수도꼭지
이라체 수도원 와인 수도꼭지

 

와인 수도꼭지를 틀어보니 듣던 대로 와인이 콸콸 나왔다. 뿌듯함마저 느껴졌다. 힘들게 되돌아온 고생에 대한 보상을 받는 기분이랄까. 아마 아침에 이곳을 발견했다면 이렇게까지 기쁜 마음이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나오는 와인을 한 모금 기분 좋게 마시고 통에 가득 담았다. 돌아온 보람이 있었고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지나쳤으면 내내 후회했을 것이다.

 

아직 한낮이었지만 힘든 산길을 쉼없이 달려와서 그런지 몸은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어디를 더 가기보다 얼른 쉬고 싶었다. 아예기의 알베르게에서 100킬로를 걸었다는 증명서를 준다는 얘기가 생각나 근처에 있는 아예기 마을로 발걸음을 옮겼고, 그곳에 있는 공립 알베르게에 짐을 풀었다.

 

아예기-알베르게
아예기 알베르게

 

공립치고는 가격이 싸지 않았지만 그래도 100킬로를 걸었다는 기념도장을 받았고, 시설이 깨끗해서 쉬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또 근처에는 이제껏 보지 못한 정말 큰 마트가 있었다. 거기서 먹을 것을 사와 저녁을 맛있게 먹으며 간만에 편하게 휴식을 취했다.

 

 

그렇게 기력을 회복하고 주변을 둘러보러 나갔다. 마을은 널찍하고 평화로웠다. 날이 어두워지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기저기 뛰노는 아이들을 구경하며 한가로이 마을을 거닐었다.

 

 

숙소로 돌아와 보니 큰 도미토리 숙소 안에는 여전히 나 혼자 있었다. 그 시간까지 아무도 없다는 것은 내가 이 큰 숙소를 혼자서 쓴다는 얘기였다. 순례길 들어 처음으로 몸과 마음의 여유로움을 느꼈다. 

 

만일 오늘 이렇게 돌아오는 사건이 생기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조금 더 갈 수는 있었겠지만 이러한 여유로움을 만끽하지는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보면 오늘 사건이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서둘러서 좋을 것 없다는 교훈도 덩달아 얻었다. 어두워서 이라체 수도원을 제대로 못 보고 지나친 것이기는 했지만 빨리 가봤자 제대로 방향을 잡지 못하면 이렇게 되돌아오게 되기도 하니까.

 

앞으로의 순례길은 온전하게 충분히 느끼고 즐기면서 가자고 마음을 먹으며 편안히 잠자리에 들었다.

 

 

P.S 와인수도꼭지에서 네덜란드인 루카스를 만나 근처 바에 들러 치즈와 빵을 가져간 와인과 함께 먹었는데 맛이 기가 막혔다. 홀짝홀짝 와인을 마시다보니 금방 알딸딸해지더라. 그렇게 마시고 루카스와는 헤어졌는데, 그 친구는 잘 갔는지 모르겠네. 이렇게 인연이 또 하나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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