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보니 레온까지 도착했다. 레온 전 마을에서 레온풍경을 바라보며 하루를 묵으려 했는데, 그 마을은 레온과 붙어있다시피한 곳이라 레온과 다름이 없었다. 어쩐지 알베르게 목록에도 나와있지 않더라니...

 

렐리에고스에서 오전 6시가 채 되기 전에 깼다. 그 전에 여러번 잠에서 깨기도 했고, 그냥 일어나는 게 낫겠다 싶어서 일어나 나갈 준비를 했다. 그러다 창밖이 환해지는 것을 보고 시계를 확인했는데, 7시 반이 되어 가고 있었다. 아까 시간을 잘못 본줄 알고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그래서 준비를 서두르다 나와서 시간을 다시 보니 7시 반이 조금 넘어 있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일출시간이 빨라진 것이다! 분명 어제까지는 8시가 넘어도 어둑어둑했는데 말이다(알고 보니 이날은 유럽의 서머타임이 끝난 날이였다).

 

 

어쨌든 시간이 8시가 아직 안된 것을 알고 다시 여유를 되찾았다. 나갈 채비를 마치고 렐리에고스를 출발했다. 길의 풍경은 어제와 달라지지 않았다. 왼쪽에는 나무, 오른쪽엔 도로를 끼고 길을 걷기 시작했다. 첫번째로 들린 마을 만실라까지.

 

 

렐리에고스에서도 보였던 만실라는 1시간 정도 걷다보니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 음식이 괜찮다는 정보를 들어서 원래 이곳에서 아침을 먹으려 했다. 하지만 일요일이고, 또 이른 시간이어서 그런지 모든 가게는 문이 닫혀 있었다. 갑자기 더 배가 고파졌다. 주변을 둘러보다 마침 문을 연 상점을 발견해서 사과주스 3팩 짜리를 사서 가방에 있던 빵과 함께 먹었다. 역시 먹을 것은 미리 준비해두면 도움이 된다.

 

먹고 나니 기운이 솟았다. 만실라는 규모도 있고 볼것들이 제법 있어서 여기저기 둘러보다보니 한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여유 있게 가려던 터라 서두를 이유는 없었다.

 

만실라
만실라

 

만실라를 지나면서 풍경이 달라졌다. 나무가 이젠 양쪽으로 늘어서 있었다. 오른쪽 옆에는 여전히 도로가 있었는데, 여기부터는 차들이 많이 다니는 메인도로로 바뀌어 있었다(젠장!). 많은 차들이 오가며 내는 소음과 매연에 살짝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여기는 어떤 차들이 주로 다니는지 보기로 했다.

 

한동안 살펴보니, 여기 차들은 4인승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주로 뒷쪽 트렁크가 나오지 않고 SUV처럼 완만하게 생긴 차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게 더 실용적이어서 그런가. 사실 외관만 봤을 때는 세단이 더 예쁜 것 같고, 그래서인지 한국에는 세단이 많다. 차에 대한 선호도 나라마다 차이가 있는 건지 궁금증을 갖다가 계속 차보는 것도 지겨워져 다시 자연풍경으로 눈을 돌렸다. 자연풍경을 보니 기분이 좋아지고 마음도 편했다. 파란 하늘 아래 다양한 풍경이 이따금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그렇게 계속 걷다가 지칠 무렵 들리게 된 어느 마을 입구의 쉼터. 쉼터는 돌로 만든 벤치와 그늘막이 인상적이었고, 오랜만에 식수도 받을 수 있었다. 거기에 미리 온 외국인 한명이 내게 다가와 인사를 하며 얘기를 건넸다. 그는 네덜란드에서 온 한스였다.

 

 

그는 많은 사람이 걷지 않는 순례길 코스를 선택해서 걷고 있었다. 스페인 북부의 한 해안에서 출발하여 산을 건너 여기로 온 것이었다. 한스는 자기가 거쳐온 여정을 얘기하고 싶어했다. 폰에 저장된 사진들을 하나하나 보여주면서 설명을 해줬다. 음악이 깔린 동영상도 있었다.

 

그가 거쳐온 풍경은 내가 지나온 곳과는 확연히 달랐다. 거칠고 날카로운 지형 그리고 쓸쓸한 색깔을 머금은 풍경들이 주를 이뤘다. 진한 회색빛이 강한 뾰족한 바위산도 보였다. 땅이 메말라 거북이 등껍질처럼 쫙 갈라져 있는 땅도 볼 수 있었다. 하나같이 쓸쓸함과 고독함을 자아내는 풍경들이었다.

 

왜 거기서부터 출발했는지는 모르지만, 여기까지 오면서 만난 순례자만 두세명 정도라고 하니 그가 길을 거쳐오면서 느꼈던 감정들이 짐작이 됐다. 어쩌면 그가 사진과 동영상을 그렇게 정성들여 찍고, 또 그것을 내게 보여준 것은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와 감정을 공유하고 공감받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그의 몸에서는 서양인 특유의 냄새가 나기도 했지만 그게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경로는 달랐지만 같은 순례여행을 하며 이 길에서 이렇게 만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기쁨이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마치고 그는 먼저 떠났다. 레온까지 간다고 하더라. 무사히 잘 가기를.

 

쉼터에서의 기분 좋은 만남과 휴식 후 다시 길을 나섰다. 레온의 모습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는 시점에 길이 도로쪽으로 빠져서 약간 아쉬웠다. 흙과 나무가 있는 언덕을 넘었을 때 탁 보이는 레온의 전경을 기대했는데... 언덕으로 가는 길도 보이긴 했지만 길을 잘못 들었다가 호되게 당한 지난 날의 교훈(?)으로 까미노 표시에 충실하게 갔다.

 

 

독특한 현대식 다리를 건너면서 대도시의 모습이 윤곽을 드러냈다. 그런데 그 순간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원래 레온 직전에 마을이 하나 더 있다고 했는데, 이렇게 바로 레온이 보이는 걸 보면 그 마을은 그냥 지나쳐버린 것 같다는 생각에 미련이 생겼다. 그렇게 가고 있는데 언덕을 벗어나자 바로 도시의 풍경이 나타났다. 표지판을 보니 거기가 바로 레온 직전에 있는 마을이 아닌가! 알고 보니 그곳도 도시의 모습이었고, 레온과 붙어 있어 그제야 모습이 드러난 것이다. 그때부턴 한결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아갔다.

 

 

레온으로 향하는 강을 지나기까지 한참을 더 들어갔고, 거기서도 중심부까지는 또 한참 들어가야 했다. 부르고스 들어갈 때가 떠올랐다. 도시의 초입에서 중심부까지 한참을 걸어 들어가야 하는 건 여기 대도시들의 특징이었다. 그래도 레온의 첫인상이 부르고스처럼 딱딱하지는 않았고, 붉은 벽돌들이 보이는 건물들이 많아 좀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성당들도 일정 간격마다 나타났는데, 도심 깊숙히 들어가면서 점점 규모가 커지는 느낌이었다. 일요일이어서 그런지 사람들이 활기차게 지나다니고 있었고, 특히 성당이나 멋진 건물을 향해서는 너도나도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누르고 있었다.

 

 

곧 넓은 광장이 나왔고, 멀리서 보았던 레온 대성당의 아치가 언뜻 보였다. 조금 더 들어가 한 모퉁이를 지나니 거대한 모습의 건물이 스윽 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레온-대성당
레온 대성당

 

정면에서 바라본 레온 대성당은 웅장했고,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보는 순간 사진을 찍기 위해 손이 저절로 움직이는 매직.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사정도 비슷한 것 같았다. 최대한 모습을 온전히 담아보려고 이리저리 움직였다. 가방을 내려놓고 성당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봤다. 부르고스 대성당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좀더 화려하고 멋을 많이 낸 느낌이랄까. 위용을 뽐내는 듯한 느낌과 함께. 성당 군데군데 섬세하게 새겨진 조각들도 보는 즐거움을 더해줬다.

 

그렇게 성당을 구경하다보니 시간이 꽤 지났다. 성당을 지나자 주변이 좀 한적해졌고, 이젠 숙소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디에 숙소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대로 쭉 가면 레온을 그냥 빠져나갈 것 같은 느낌에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었지만 확실하게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 유모차에 아기를 끌고 가는 한 가족을 만났는데, 거기 아저씨가 지도를 살펴보더니 본인이 직접 길을 안내해 주겠다고 하는 게 아닌가. 그럴 필요까지는 없으니 위치만 알려주면 된다고 얘기를 했지만 그는 정열의 스페인 사람이었다.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라 나섰고, 그는 지도를 열심히 보며 길을 찾아 나섰다. 또 내게 뭐라고 계속 얘기를 했는데 잘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가우디', '바르셀로나' 같은 단어가 들려서 그것에 대해 설명하는구나 하고 짐작만 했다. 

 

그렇게 한참을 가다가 한 건물에서 멈춰섰다. 바로 내가 찾았던 건물이었다. 너무 고마운 마음에 가방에 있던 사과주스를 하나 꺼내서 건넸다. 그는 괜찮다고 했지만 강하게 쥐어줬다. 정말로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와 헤어지고 건물로 들어갔는데, 앞에 보이는 문은 잠겨 있었다. 옆으로 조금 가보니 그곳에 알베르게 표시가 되어 있었다.

 

레온-알베르게
레온 알베르게

 

체크인을 하려고 올라갔는데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몇 번 마주쳤던 한국인 순례자였다. 짐을 두고 가서 인사를 하니 그녀는 놀라면서 맞아주었다. 그동안의 이야기를 잠시 나누었는데, 자기 이야기를 계속해서 하는 것을 보니 하고 싶었던 얘기가 많았던가 보다.

 

방으로 올라가 씻고, 레온 주위를 둘러보러 숙소를 나섰다. 역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대성당이었다. 밖은 이미 어두컴컴해져 있었고, 불빛에 비친 성당의 모습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그렇게 성당을 중심으로 주변을 둘러보다 배가 고프기도 하고 더 둘러보면 시간이 많이 지날 것 같아 알베르게에 붙어 있는 호텔 레스토랑으고 가서 순례자메뉴를 주문했다. 그 자리에 두명이 합석하게 됐는데, 순례길에서 만났던 일본인들이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통성명도 하면서 함께 식사를 했다. 서로 궁금한 것을 물어보다가 내가 하루 더 레온에 있을 거라고 하니 한 일본인이 자기도 그렇게 해야겠다고 하면서 알베르게는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왠지 같이 다니고 싶어하는 느낌이었다. 식사 후에도 성당 미사를 같이 가지고 약간 조르듯이 얘기를 했는데, 그게 부담으로 다가왔다. 오히려 별 상관하지 않고 자기 할 거 하는 다른 일본인이 편하게 느껴졌다. 

 

어쨌든 식사는 괜찮았고 순례길 들어와 먹어본 식사 중 가장 배가 불렀다. 후식도 나와 라이스 푸딩을 먹었는데, 배는 불렀지만 먹어보고 싶었고 나름 맛이 좋았다. 그렇게 오랜만에 저녁을 배불리 먹고 숙소로 들어왔다. 미사도 가보고 싶긴 했는데, 같이 가자고 한 일본인이 좀 부담스러워 안 간 것 같기도 하다. 내일 기회가 되면 한번 가보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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