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전날 레온에 오후 늦게 도착했기 때문에 오늘 여유있게 둘러본 다음 잠깐만 길을 걷고 마무리를 하려는 게 이날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계획은 예상치 못한 변수로 바뀌기 쉽다.

 

월요일 아침이어서 그런지 학생들이 길가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하는 와중에 곳곳에 담배를 물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그렇게 대놓고 피는 건 한국과 다르긴 한데...

 

 

아침 햇살에 비친 레온 대성당을 지나 화살표를 따라서 레온을 빠져나가는 다리에 도착했다. 다리 밑에는 넓은 강이 흐르고 있었고, 햇살에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사진을 찍으려는 차에 외국인 아줌마가 내 모습을 보고 다가와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다. 풍경사진을 찍으려고 했기에 괜찮다고 했는데도 계속 찍어준다길래 여러 배경으로 찍게 됐다. 사진을 찍고 나서 아줌마는 내가 어디서 왔는지도 묻고 잘 걸으라며 인사를 해주고 떠났다. 적극적이고 열정 있는 그녀의 모습에 기분이 좋아졌다.

 

레온
레온

 

레온을 벗어나는 지점에서 강을 따라 내려갔고, 중간쯤 갔을 때 시가지로 다시 들어갔다. 날이 조금씩 쌀쌀해지면서 큰 도시에 들리면 점퍼를 사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레온에 도착했을 때 봐둔 상점이 있어서 들렸는데,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일단 보류하고 나와 묵었던 숙소로 잠시 들어갔다. 곧 오픈 타임이라 벌써부터 순례자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다시 온 김에 아침에 먹었던 식사에 대한 기부금을 넣고 길에 대한 정보를 보고 있던 그때, 어제 봤던 한국인 무리 중 한명이 들어오며 인사를 했다.

 

 

그렇게 서로 마주 앉아 얘기를 나누다가 유럽은 11월에 들어가면 크리스마스 세일을 미리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순례길을 걷는 동안 적어도 낮에 돌아다닐 때는 점퍼가 당장 필요한 건 아니어서 산티아고에 도착한 이후에 사도 괜찮겠다 싶었다.

 

그래도 어제 들어오면서 봐둔 큰 아울렛은 한번 가보고 싶었다. 그래서 레온의 초입까지 먼 거리를 걸어 갔다. 규모에 비해 막상 볼 건 별로 없었다. 양말이나 좀 보려고 살펴봤는데 길이가 너무 길어 고민하다 집었던 걸 다시 내려놨다. 봤을 때 탁 마음에 들지 않으면 결국 안 쓰게 되는 걸 알기 때문에.

 

그래도 이렇게 와보니 미련은 없어졌고, 옆에 있던 큰 마트에 들러 필요한 것을 사서 교외 방향으로 강을 따라 올라갔다. 이미 시가지 쪽은 볼만한 데는 다 봤기에 강을 따라 걸어보고 싶었다.

 

 

그렇게 하여 다시 레온을 빠져나가는 지점으로 오게 됐다. 사실 오늘 레온을 빠져나가기로 마음이 결정되어 미련 없이 다리를 건넜다. 레온을 나오는 길은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마을이 바로 붙어있었는데, 그 마을까지 벗어나서야 레온을 벗어났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후에도 한참을 도시의 느낌을 주는 풍경과 도로를 마주하며 걷다가 오늘 머물려 했던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을 돌아보며 알베르게를 위치를 살폈더니 좀 외떨어진 곳에 있었다. 표지판을 따라 쭉 들어갔는데, 어떤 할머니가 내게 얘기를 걸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알베르게가 문을 닫았다고 하는 것 같았다. 혹시나 해서 문앞까지 가봤지만 알베르게 건물은 굳게 잠겨 있었다.

 

잠시 망연자실하여 건물 앞 잔디밭 벤치에 앉아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을 했다. 레온을 떠나 조금이라도 더 가서 머물려고 온 것이었다. 더 걸으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돌아가는 건 더더욱 아니었다. 이렇게 된 거 좀 더 걸어보기로 하고 그 마을에서 나오니 갈림길이 나왔다. 그 중 전통적인 까미노 코스를 택했다. 

 

그때부터 고속도로와 나란히 걷는 길이 시작됐다. 위협적으로 쌩쌩 달리는 차들과 거기로부터 나오는 매연이 함께 했지만 그래도 걷는 건 좋았다. 날씨가 화창해서 그런지 점점 기분이 좋아졌고, 한참을 걸어도 힘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걸어 다음 마을에 도착하니 오후 5시가 되었다.

 

 

그런데 마을에 있는 알베르게가 도로 바로 옆이라 좀 꺼려졌고, 오늘따라 길을 걷는 게 즐거워 더 가도 좋을 것 같았다. 다음 마을은 10킬로 넘게 떨어져 있었다. 가까운 거리가 아니어서 고민이 됐지만 더 걷고 싶은 마음이 강해져 다시 길을 나서게 됐다. 바로 그 발걸음이 무리한 여정의 시작이었고, 사하군 여정에 이어 또다른 고생길이 될 줄은 까맣게 몰랐다.

 

 

걷기 시작하니 기분이 좋았다. 뜨겁게 내리 쬐던 태양의 기운이 수그러들면서 날도 선선해졌다. 여전히 차도 옆길이었지만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렇게 한참 가는데 어느 순간 주위에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 나왔다. 게다가 해까지 갑자기 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시간을 보니 6시가 막 넘어가고 있었다. 7시는 되야 해가 지는 줄 알고 전에 사하군 가는 길과는 다르게 석양을 감상하며 걸으려 했던 것인데 일몰시간이 이렇게 앞당겨지다니!(사실 얼마전 끝난 서머타임 시간을 제대로 고려 못한 것이었다)

 

 

마음이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다음 마을까지는 생각보다 많이 멀었다. 중간에 주유소 나온 것 이외에 여전히 보이는 건물은 없었고, 고속도로를 차들과 같이 달리는 느낌이 들었다. 해가 점점 사라지면서 발길은 빨라졌다. 생각하기 싫은 상황이 다시 반복되고 있었다. 해지기 전에 다음 마을까지 충분히 도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시간 착오로 인해 그 예상은 와장창 깨져버리고 말았다.

 

 

 

결국 마을에 도착하기전에 어둠이 찾아왔다. 계속 빨리 걷다 보니 어느 순간 발이 아프기 시작했다. 전에 물집 잡힌 곳이 욱신거려 다시 생기는 게 아닌가 두렵기도 했지만 발걸음을 늦출 수는 없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사하군 때처럼 길을 잘못 들지는 않은 것 정도.

 

그렇지만 다음 마을은 걸어도 걸어도 그 형체가 나타나지 않았다. 완전히 어두컴컴해지기 전에는 도착하면 좋겠다 생각하다가 호텔이라 써 있는 곳이 나타나자 마음이 좀 놓였다. 호텔이 있다는 건 근처에 마을이 있다는 얘기니까.

 

그러나 막상 그 앞에 다다랐을 때 호텔과 호스텔 하나를 빼고는 마을의 흔적은 없었다. 당황하며 근처 사무실 같은 곳에 있는 사람에게 찾고 있는 마을을 물어보니 1킬로 더 가면 있다고 했다. 그 사이 이미 완전한 밤이 찾아왔다. 그래도 그 정도면 금방 갈 수 있겠다 싶어 한숨을 돌렸다. 발을 살펴보니 아프긴 했지만 물집히 잡힌 것 같지는 않았다. 이미 많이 지쳐 있었지만 지체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얼른 다시 길을 나섰다.

 

어둠을 뚫고 계속 걸어도 도로 위의 차만 보일 뿐 마을이 보이지 않자 또다시 불안해졌다. 길을 잘못 든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 불빛이 보이는 곳이 나타나 혹시 그쪽이 아닐까 해서 가보았는데 거기엔 점멸하는 신호등과 두어 개의 작은 건물들만 있을 뿐이었다. 낙담하다가 차를 타고 나가려는 아저씨가 보이길래 가려는 걸 막고 마을 위치를 물어봤다. 아저씨는 내가 왔던 곳을 가리키며 거기서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꽤나 열정적으로 알려줬다. 차를 태워줄까 제안도 했지만 정중히 사양했다. 

 

친절한 그 덕분에 안심을 하고 다시 가던 길로 돌아가 어둠을 뚫고 걷기 시작했다. 곧 가로등이 나왔고 따라가다보니 드디어 불켜진 건물을 발견했다. 마을에 도착한 것이다.

 

 

 

사실 가던 방향이 맞았고, 조금만 더 가면 되는 거였는데 캄캄해서 보이질 않으니 멀게만 느껴졌던 것이었다. 가로등이 보이는 순간부터 모든 게 감사했다. 길을 알려준 아저씨부터 환하게 길을 밝혀주는 가로등 그리고 쉴 수 있게 나타난 마을과 알베르게.

 

그리고 깨달음이 있었다. 불안과 의심이 있으면 제대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 확신과 믿음이 있어야 자신 있게 나아갈 수 있다는 것. 까미노를 통해 이렇게 또 인생을 배웠다. 한편으론 꼭 이렇게까지 고생을 했어야 했나 싶기도 했지만 어쩌겠나. 나의 선택이 만들어 낸 것이니 받아들이는 수밖에.

 

알베르게에 들어가보니 레온에서 만난 유스케가 보였다. 늘 담담하게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였지만 이렇게 보게 되니 무척이나 반갑게 느껴졌다. 알베르게는 숙박비로 예상보다 비싼 금액을 받았지만 지금의 상태에선 그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안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저녁을 먹고 있었다. 갑자기 배가 고파 시간을 보니 8시가 넘어 있었다. 근처 상점이 열었다고 해서 빵과 음료를 사와 먹고 나니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간단하게 씻고 나와 주변 정리를 하면서 하루를 돌아볼 수 있었다. 늦게 도착하여 커다란 공간에 있는 침대를 배정받았는데, 썰렁하긴 했지만 노부부 외에 아무도 없어서 편하게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더 이상 뭘 할 생각은 엄두도 못내고 내일의 일정만 잠깐 살펴보고 나서 그대로 잠자리로 직행했다.

 

하루를 돌아보니 정말 고생을 사서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온에서 여유 있게 하루 더 머물러도 되는 것을 같은 곳에서 다시 자고 싶지 않아 조금만 더 간다는 게 변수가 생겼고, 중간에 필이 받아서 기분따라 더 걷다가 또다시 어둠과 함께 몸이 만신창이가 되고... 두번씩이나 이렇게 겪고 나니 확실하게 머리와 몸에 각인된 느낌이다. 순례길을 걸을 때는 절대 무리를 하지 말자고. 천천히 길을 즐기면서 나아가는 초심을 잊지 말자고.

 

한국인 순례자들을 계속 만나고 여러 사람과 얽히면서 나도 모르게 마음이 속도가 빨라지고 사람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강했던 것 같다. 하지만 어디를 가도 사람들은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유롭게 갈 수 있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초심을 간직하며 앞으로의 순례길은 그렇게 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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