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리온에서 오늘 도착한 사하군까지는 40킬로가 넘는 거리였다. 처음부터 사하군으로 갈 생각은 아니었다. 일정표에는 레디고스까지 나와 있었고, 일단은 거기까지 생각을 하고 출발한 길이었다.

 

이번 일정은 초반에 중간 마을이 없어 긴 거리를 가야 했기에 먹을 것 등을 미리 준비했는데, 그러다보니 배낭무게가 평소보다 무거워진 상태였다. 그래도 가면서 먹다 보면 조금씩 가벼워질테니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까리온을 벗어나는 길에 전날 봤던 강을 건너게 됐다. 어제 오후 햇살에 비칠 때와 느낌이 달랐기에 미리 와서 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리를 지나니 성당 같이 보이는 큰 건물이 있었고, 맞은편에는 쉼터가 있었다. 건물의 자태도 좋았거니와 그 옆이 숲으로 이루어져 있어 잠시 배낭을 벗어두고 구경을 했다. 주변을 천천히 돌아보며 숲길도 잠시 걷다가 순례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걸은지 한시간쯤 지났을까. 웬 건물이 눈앞에 나타났다. 분명 마을이 금방 나타난다고 하지 않았는데. 잠시 둘러보고 있는데 한 아저씨가 오더니 여기는 사유공간이라고 얘기해 줬다. 그러고 보니 여긴 집형태의 건물이었고 창고처럼 생긴 곳도 있었다. 아침도 안먹고 나선 거였기에 들린 김에 한쪽에서 빵을 꺼내 먹었다. 주위에는 나무들이 많이 모여 있어서 쉬기에도 적당했다.

 

 

다시 길을 나섰다. 역시나 마을의 모습은 금방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중간에 쉴 만한 공간들이 적절하게 있었다. 다 순례자들을 위해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것이겠지. 생각지 못하게 쉴 공간들이 있는 것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한참을 걷다 어느 구간에 들어서자 넓은 들판이 펼쳐졌고, 그때부터는 한동안 그늘도 없이 걷게 됐다. 정오가 되기 전이라 무덥지는 않았지만 긴 구간을 계속 걷다 보니 어깨가 아파왔다. 그럼에도 길게 걸을 수 있었던 건 좋았다. 중간에 마을이 있으면 보통은 거기서 쉬거나 한번은 둘러보게 되는데, 그럼 생각의 흐름이 끊기기 쉽다. 그런 측면에서 이렇게 긴 구간을 걷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었다. 묵묵히 걷다가 어렸을 적 기억이 떠오르면서 잠시 그리움과 아련한 감정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걷고.

 

 

그 길에서 스페인 3인방 할아버지들을 또 만났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반가운 마음에 배낭에서 귤을 꺼내 건네자 그들은 내게 젤리통을 내밀었다. 생각지 못한 젤리를 재밌게 바라보며 하나 집어 먹었다. 그들은 곧 다시 출발했는데, 젊은이 못지않게 잘 걷는 모습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친구들끼리 이야기하며 걷는 모습도 좋아보였다.

 

 

다시 길을 걷기 시작한 지 한참이 지나 드디어 첫번째 마을을 만났다. 무거워진 배낭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하며 시계를 보니 그렇게 많은 시간이 지나진 않았고 레디고스까지는 이른 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가보자 하고 출발했다. 그렇게 걷다가 60이 넘은 이태리 아저씨를 만나 한참동안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또 그 구간에서는 한국인으로 보이는 여자 둘이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가방도 없이 스틱만 가지고 똑같은 옷을 입고 서둘러 가는 모습이 왠지 우스꽝스럽기도 했다.

 

 

이태리 아저씨와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가다 레디고스에 도착했다. 레디고스는 오래된 느낌의 마을이었다. 성당에서 이태리 아저씨와 재회하여 인사를 나누고 구경을 하고 나니 특별히 더 할 게 없었다. 잠시 바에 들어가 또르띠아를 먹으면서 더 갈지말지를 고민했다. 다음 마을까지는 한시간 이내로 갈 수 있었고, 사하군까지는 17킬로를 더 가야 했다. 시간은 오후 3시 무렵. 레디고스에 머물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걸 알고 좀 더 가보기로 결정했다.

 

레디고스
레디고스

 

그렇게 다시 길을 나섰고, 그때부터는 한낮의 태양을 그대로 느끼며 나아가야 했다. 그런데 걸으면서 점점 신이 났다. 발상태도 좋아져서 걷는 게 편해지기도 하고. 컨디션이 좋은 것을 느끼면서 계속 걷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올라왔다. 마을 하나를 그대로 지나치면서 사하군까지 가는 것으로 마음이 기울었던 것 같다. 보통 천천히 걷는 편이었는데 그때는 유독 속도를 빠르게 냈고 앞서가던 순례자들도 추월하면서 어느덧 다음 마을에 도착하게 됐다. 그 마을은 높게 솟은 언덕이 있어서 거기에 올라 주변을 잠시 감상하기도 했다.

 

그렇게 잠시 쉬다가 걷다 보니 사하군 전에 있는 마을에 다다르게 됐다. 이곳은 알베르게도 닫혀있어 보였고, 영 사람사는 것 같지가 않게 조용했다. 어차피 머물 곳은 아니어서 잠시 둘러보다 출구로 나가 사하군으로 향했다.

 

이때 시간이 저녁 6시가 조금 안될 때여서 부지런히 걸으면 해지기 전에는 사하군에 도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서부터가 오늘 일정의 하이라이트이자 고난의 시작이었다.

 

내가 갖고 있는 정보로는 마을 출구로 나와 사거리에 이르렀을 때 도로를 따라 나란히 가지 말고 옛 까미노길로 가는 게 좋다고 했다. 그런데 표지판에는 도로로 가는 오른쪽으로 까미노 표시와 순례자길이 나와 있었다. 

 

예전에 정보를 참고해 갔다가 잘못 길을 갔던 경험이 있었음에도(물론 그때는 내가 착각을 했던 거였지만) 정보를 믿고 도로로 가는 오른쪽이 아닌 왼쪽길을 택했다. 표지판은 분명 오른쪽길로 나와있었지만 왼쪽으로 가는 길도 분명 있을거라 믿었던 것 같다(지금 생각하면 뭐에 홀렸던 것 같기도 하다). 그 선택이 나를 고생길로 이끌었다.

 

 

그렇게 방향을 잡고 보니 언덕으로 길이 나 있었는데, 그때까지는 설명에서 나오는 언덕이구나 하고 별 의심없이 갔다. 그렇게 가고 있는데 멀리서 누군가가 소리를 지르는 게 들렸다. 소리나는 쪽을 보니 어떤 아저씨가 손짓을 하며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돌아가라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난 옛 까미노길로 가는 거니까 괜찮다는 손짓을 하고 쿨하게 가던 길로 계속 갔다. 만약 거기서라도 되돌아갔다면 고생길은 열리지 않았으련만...

 

그때까지만 해도 가던 길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가졌던 것 같다. 난 남들과 다른 길을 간다는 그런 생각도 하고. 하지만 설명에 나와 있던 언덕일 거라 여겼던 곳은 뭔가 정상적이지 않았고 또다른 언덕이 계속해서 나왔다. 그리고 그때쯤 걷는 길에 트랙터 자국만 나 있는 것을 보았다. 사람이 다니는 길이 아닌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아직 생각했던 곳이 안 나왔을 뿐이라며 이번 언덕을 넘으면 뭔가 나오겠지 기대를 했다.

 

 

하지만 언덕을 넘어도 도시의 모습은 나오지 않고 날이 저물기 시작하면서 의심과 불안감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여긴 아무리 봐도 까미노 표시를 찾을 수 없었고 사람을 볼 수 없었다. 저멀리 간간히 농장기계들만 먼지를 내며 움직이는 것밖에.

 

시간이 7시 가까이 되자 그제서야 발길을 멈췄다. 가던 길에 대한 확신이 없어졌고 설사 계속 가면 뭔가가 나올 수도 있겠지만 날이 저물어 곧 깜깜해지는데 주위에 아무 것도 없는 언덕 한복판에 계속 있다간 큰일날 것 같다는 위기감이 발길을 돌리게 했다. 그리고 왔던 길로 있는 힘껏 빠르게 걸어 돌아갔다. 날이 이미 저물고 있었기에 적어도 갈림길까지는 해지기 전에 도착해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몸은 이미 지칠대로 지쳐 있었고 다리도 아파오기 시작해 사실 걷기 힘든 상태였지만 거기서 쉴만한 여유가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생존본능이 발동한 것인지 몸의 아픔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빨리 돌아가는 것만 신경썼다. 그런데 그렇게 가다 뒤를 돌아봤는데 언덕에 해지는 풍경이 보였다. 가기도 바쁜데 그 모습을 카메라로 담았다. 풍경이 좋았다기보단 어쩌면 그렇게 갔던 것에 조금이라도 의미를 부여하려고 했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헛고생은 아니었다는 걸 증명하고픈 하나의 보상물을 바랬던 건 아니었을런지...

 

 

그렇게 부지런히 걸어 30분여 정도 걸려서 처음 갈림길로 올 수 있었다. 일단 근처 마을로 다시 들어갔다. 더 걷기에는 힘이 들어서 그 마을에서 묵을 수 있기를 내심 바랬는데 역시나 알베르게는 잠겨 있었다. 마을주민에게 물어보니 문을 닫았다고 했다. 

 

허탈한 마음으로 가방을 내려놓고 어떻게 할지 생각에 잠겼다. 날도 저물어서 계속 움직이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전 마을이 사하군보단 좀 더 거리상 가까웠지만 거기로 되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다 마을주민이 사하군까지 6킬로정도라고 한 게 기억이 나 그 정도면 갈만하지 않을까 싶었다. 이미 주위는 깜깜해졌지만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사하군으로 출발했다.

 

갈림길에서 이번엔 까미노 표시를 제대로 확인하고 도로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걸었다. 깜깜해서 잘 안 보이긴 했지만 달빛이 밝아 불빛 없이도 걸을만 했다. 무엇보다 까미노표시를 따라 가는 길이다 보니 안심이 되었다. 하늘에는 별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고, 별빛을 바라보며 길을 걷는다는 생각에 나름 운치 있게 느껴졌다. 하지만 몸이 힘들어지면서 그런 생각은 금방 사라져버렸다.

 

 

다리가 점점 아파오면서 얼른 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걷다 또 한번 실수를 하고 말았다. 도로를 가로지르는 곳에서 까미노 표시대로 간 것 같은데 처음 가던 길과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게 아닌가. 뭔가 이상했지만 그래도 표시대로 간 거라 생각했는데, 회전구간에서 아예 반대로 도는 것을 보고 그제야 잘못 들어섰다는 것을 알았다. 그 충격으로 다리는 더 아파왔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오로지 빨리 가서 쉬어야겠다는 생각뿐.

 

다시 까미노표시가 있었던 곳으로 돌아가서 이번엔 원래 가던 방향으로 걸어보니 그쪽에 표시가 또 나왔다. 깜깜한 밤중에 걸어서 방향감각이 무뎌진 건지 표시가 이상하게 나 있던 건지는 잘 모르겠고 뭔가 억울하기도 했지만 지체할 수는 없었기에 가던 길을 계속 갔다. 

 

그렇게 한참 가다보니 오른쪽으로 가는 표시가 나왔다. 이번엔 신중하게 이리저리 살펴봤는데 방향이 확실하게 나와 있어서 믿고 갔다. 한참을 도로 오른쪽으로 가길래 내심 불안한 마음이 있었는데 그러다 도로방향으로 이어졌고, 곧 다리가 보이자 안심이 됐다. 다리를 건너니 성당 같은 게 하나 있었는데 깜깜해서 잘 보이지 않아 잠시 쉬기만 하고 길을 나섰다.

 

이미 그때 다리가 너무 아파 이러다 뼈가 부러지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불빛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갈림길에 다다랐을 때 아무런 표시가 없었다. 앞으로 가봤지만 계속 컴컴했고 확실한 길로 가는게 낫겠다 싶어 다시 돌아와 도로를 타고 걷기 시작했다. 그러니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그렇게 걷다 드디어 사하군이라는 표지판을 볼 수 있었고, 조금 더 가보니 건물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숙소가 있는 시내까지는 한참 더 가야했다. 이미 풀릴대로 풀려버린 다리를 절뚝거리며 그렇게 시내로 들어갔다. 밤 9시가 넘은 시간. 정말 하루종일 대장정을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원하던 대로 실컷 걷게 되기도 하고...

 

막상 사하군으로 들어는 왔는데 숙소를 어떻게 할지 고민이 됐다. 시간상 알베르게를 가면 바로 씻고 자야 했는데 그러고 싶진 않았다. 호스텔도 고려하면서 일단 알베르게로 갔다. 거기서 예전에 만난 적이 있는 한국인 순례자를 봤다. 알베르게 정보에 대해 좀 묻다 호스텔을 한번 살펴보러 갔다. 다시 알베르게로 왔을 때는 이미 문은 잠겨 있었다. 기왕 이렇게 된거 호스텔에서 편히 쉬자 생각하고 거금(?) 35유로를 지불하고 들어갔다. 

 

독립된 공간에서 편히 있을 수 있고 시간 제약 없이 돌아다닐 수 있는 호스텔은 당시의 상태에서는 최적의 숙소였다. 우선 짐을 풀고 씻었다. 빨래까지 할 여력은 나지 않아 한쪽에 보관해 두고 드디어 푹신한 침대에 앉아서 쉬게 되었다. 전 숙소에서 만났던 자전거 순례자가 준 신라면이 생각나 생으로 뿌셔 먹었는데 어찌나 맛이 좋던지! 거기에 귤로 배를 채우니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 배까지 부르자 아무것도 할 의욕이 나지 않았다.

 

내일은 사하군에서 하루 쉬기로 했다. 오늘 무리해서 걸은 것을 알기에 하루 정도는 푹 쉬면서 컨디션을 조절할 필요가 있었다. 내일은 늦잠을 잘 생각을 하고 그대로 침대에 뻗어 누웠다. 파란만장했던 이번 순례길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