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떠보니 랜턴불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방을 비추고 있었다. 짐을 챙기는 소리도 들렸다. 불빛과 소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둘씩 멀어져 갔다. 그들은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순례길을 향해 떠났다. 

 

곧 날이 밝아오기 시작하고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이미 반 이상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슬슬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짐을 챙겨 한명씩 나가는 동안 오히려 천천히 움직였다. 빨리 가는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지금 이순간 과정 하나하나를 제대로 느끼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어제 함께 왔던 순례자들도 나갈 준비를 마쳤다. 씨익 웃으면서 인사를 하고 먼저 보냈다. 그렇게 하나둘씩 떠나고 방안에는 나와 외국인 커플이 남아 있었다. 보아하니 이 커플은 빨리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니 프랑스에서 왔다고 했다. 그쪽에서 뭐라고 얘기를 계속 했는데, 사실 잘 알아듣지는 못했다. 고개를 몇번 끄덕이며 알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도 이제 출발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밍그적거리는 프랑스 커플과 인사를 나누고 숙소를 나왔다.

 

 

생장의 아침은 짙은 안개로 뒤덮여 있었다. 이렇게 짙은 안개를 최근에 본 적이 있었던가 생각하면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어제 봤던 마을의 건물들이 희미하게 보였고 안개와 어우러진 모습이 신비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이윽고 마을을 빠져나가는 입구에 도착했다. 순례자들은 다 떠났는지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고요한 분위기 속에 이제 순례길을 시작한다는 설렘이 마음을 감싸왔다. 

 

입구에는 문이 하나 서 있었다. 이제 이 문을 나서면 산티아고 순례길이 시작된다.

 

 

▶산티아고 순례길 이야기 <3>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나는 마을에는 대부분 알베르게(순례자 숙소)가 있다. 마을의 규모에 따라 알베르게의 수와 위치도 다양하다. 어느 정도 큰 마을에 머물게 될 때는 알베르게가 마을 중심에 있고, 그런 경우 알베르게와 순례길의 출발위치가 꽤 떨어져 있기도 하다. 미리 출발하는 장소를 봐두지 않으면 마을에서 헤매는 경우도 생긴다. 이를 대비해 전날 쉬면서 미리 출발위치를 확인해두는 것이 좋다. 다른 순례자들이 출발할 때 같이 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간밤에 잠을 설쳤지만 기분만은 상쾌했다. 길을 내딛는 한걸음 한걸음이 가볍기만 했다. 짙게 끼어 있던 안개도 서서히 거치면서 주변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가다가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늦게 출발했기는 했지만 한참을 걸어도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지금 걷고 있는 길도 차도였고, 간간히 차들만 지나갈 뿐이었다. 지나가는 차들을 바라보며 가고 있는데 한 운전자는 손을 들며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아 여기는 차도 순례자들을 반갑게 맞아주는구나! 

 

여전히 찜찜한 마음으로 걷다가 문득 아까 마을을 나설때 갈림길이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가는 길을 확인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때 길을 잘못 들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가는 길이 맞을 수도 있겠지만 내 마음은 얼른 돌아가라고 하고 있었다.

 

그렇게 발길을 돌려 갈림길이 있던 곳으로 돌아왔다. 순례자 사무실에서 줬던 안내지도를 꺼내고 주변 이정표를 살펴보다가 길을 잘못 들었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처음에 들어선 길은 아마 차들이 다니는 길이었던거 같았는데, 표시가 양쪽에 다 되어있어 헷갈렸던 거였다. 비록 잠깐 길을 잘못 들기는 했지만 이제라도 제대로 길을 찾아서 안심이 되었다.

 

한번 더 길이 맞는지 확인한 후 다시 걷기 시작했다. 곧 산으로 이어지는 오르막이 나왔고 제대로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출발 전에 봤던 순례길의 첫날 일정은 피레네 산맥을 가로지르는 코스였다. 산으로 향하는 오르막을 보니 이제 진짜 순례길을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다른 순례자들은 보이지 않았지만 걷을 수 있게 나 있는 길이 보이면서 더는 불안하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길을 따라 가기만 하면 됐다.

 

 

오르막은 계속 이어졌고 시간이 지나면서 짐을 채운 배낭의 무게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눈앞에 펼쳐져 있는 풍경들은 그 무게를 잊게 했다. 파아란 하늘 아래 산과 언덕, 나무들이 어우려져 있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그 모습에 취해 자꾸 발걸음이 멈춰졌다. 하늘의 푸른빛과 자연의 초록빛이 어우러진 모습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걸으면서 시시각각 변해가는 풍경을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한시간쯤 걸었을까. 커다란 건물이 보이기 시작하고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곳은 순례자들이 잠깐 쉬면서 요기도 할 수 있는 장소였다. 나중에 안 거지만 이곳은 오리손 알베르게라고 미리 예약을 통해서 이용할 수 있는 숙소가 있었다. 그래서 이 곳에서 자고 순례길을 시작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오리손-알베르게
오리손 알베르게

 

순례길의 첫 휴식지에는 미리 출발했던 순례자들이 여기저기에서 쉬거나 음식을 먹고 있었다. 카페 안에는 간단한 음식과 음료를 팔고 있었다. 나도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했다. 배가 고프지는 않아서 가져온 물통에 물만 받아마셨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까 걸어오면서 봤던 풍경들과 또다른 모습을 바라보며 눈과 마음이 힐링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제 다시 출발할 시간이었다. 잠깐 쉬다가 다시 배낭을 매니 그 무게가 확 느껴졌다. 그래도 잘 쉰 덕분인지 그 무게감도 기분 좋게 느끼며 걷기 시작했다. 

 

휴식장소를 지나면서 오르막의 경사는 점점 높아지기 시작했다. 눈앞의 풍경도 아까와는 다른 모습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넓은 들판이 나오고 한쪽에는 소들이, 다른 한쪽에는 양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그리고 길을 안내해주는 표지판도 보이기 시작했다. 

 

 

 

▶산티아고 순례길 이야기 <4>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순례자들의 길안내를 담당하고 있는 많은 표지판은 순례길의 트레이드마크. 
표지판이 있기에 순례자들은 길을 잃을 염려없이 안심하고 순례길을 걸을 수 있게 된다. 보통 표지판은 노란색 색깔의 화살표로 되어 있는데, 그 외에도 길마다 마을마다 다양한 형태의 표지판을 볼 수가 있다. 

 

 

이제는 내 앞뒤로 걷고 있는 순례자들도 볼 수 있었다. 순례자들은 혼자 또는 무리지어 같은 길 위에서 걷고 있었다. 그들을 아는 것도 아니고 옆에서 같이 걷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들과 함께 한다는 일체감이 들었다. 혼자 걸어도 혼자 걷는 것 같지 않은 느낌이랄까. 점점 오르막은 높아지고 걷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힘이 조금씩 들었지만 마음만은 줄곧 평화로웠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경계를 이루는 피레네 산맥은 역시 듣던 대로 만만치 않은 곳이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오르막과 한낮에 쏟아지는 태양의 열기는 순례자들을 점점 지치게 만들었다. 중간중간 쉬면서 배낭도 내려놓고 수분도 보충하면서 페이스를 조절을 하면서 순례길을 이어나갔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언덕길 오르막에 숲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는 오르막이 끝나고 평지가 이어졌다. 양쪽에 늘어서있는 나무들이 햇볕을 막아줘 시원하게 걸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참 숲길을 걷다가 빗장으로 된 간이문이 보였고 그 문을 열고 나가자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건물이 보이자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것은 피레네 산맥을 무사히 건너 스페인으로 건너왔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게 첫 순례길을 마치고 도착한 곳은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 피레네 산맥에 둘러싸여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는 이 곳에 오늘의 숙소가 있었다. 론세스바예스는 수도원과 여러 성당이 자리 잡은 역사적인 곳으로 수도원 안에 알베르게가 있다. 알베르게의 규모가 굉장히 커서 산티아고 순례길에 있는 알베르게 중 가장 큰 축에 속했다. 

 

숙소가 있는 수도원에 다가가니 이미 씻고 나왔는지 가벼운 복장으로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론세스바예스
론세스바예스

 

수도원으로 들어가 순례자 여권을 보여줬다. 안내자가 여권에 도장을 찍어주면서 자리를 배정해주고 위치를 알려줬다. 처음 찍게 된 도장이 신기해 잠시 구경하고 짐을 챙겨 숙소로 들어갔다. 

 

숙소는 굉장히 넓었고 2층 침대가 멀리까지 이어져있었다. 새로 단장한지 얼마 안되어 깔끔한 침대와 샤워시설을 이용할 수 있었다. 배정된 침대 주변에는 이미 도착한 순례자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처음 보는 그들과 약간은 어색하지만 그래도 웃으면서 인사를 나눴다. 올라!

 

짐을 풀고 샤워를 한 후 잠시 휴식을 취하고 수도원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도원 안에는 순례자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물건을 팔고 있었고, 하나하나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수도원 옆에 있는 성당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모여서 기도를 드리는 건가 생각하며 잠시 둘러보고 나왔다. 

 

 

내가 성당에서 본 것은 알고 보니 순례자를 위한 미사였다. 이 미사를 통해 사제가 순례자의 안전과 평화를 기원하며 순례자들의 손을 잡아주고 축복을 건네준다고 하였다. 사전에 그런 것을 모르고 와서 그냥 지나친 것이 아쉬움으로 남기도 했다. 산티아고 순례길 중에는 평소 접하지 못하는 것들을 만나게 되기도 한다. 잘 모를 때는 일단 참여해보는 게 좋을 수 있다. 쉽게 경험해보지 못하는 소중한 추억이 될 수도 있으니까.

 

구경을 마치고 수도원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식당에서 다른 순례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 순례자들을 위한 코스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스프와 빵을 비롯해 다양한 음식들을 맛볼 수 있었다. 원형의 식탁에 둘러앉아 다른 순례자들과 먹게 되었다. 여러 나라의 언어들이 뒤섞여 있는 식탁의 풍경이 생소하고 신기했다. 

 

한 순례자가 갑자기 내게 국적을 묻더니 '안녕하세요'를 우리말로 뭐라고 하는지 물었다. 그래서 알려줬더니 매우 신기해하는게 아닌가. 사실 그 반응이 그닥 탐탁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왜였을까? 그 사람의 표정과 반응에서 우리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저녁을 먹고 숙소로 들어오니 일찌감치 누워 있는 사람도 있었고 다른 순례자들과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주변정리를 마치고 나니 어느덧 시간은 10시가 되었고, 알베르게의 불은 하나둘 꺼지기 시작했다. 

 

 

 

산티아고 순례길 이야기 <5>

순례자들이 이용하는 알베르게는 정해진 몇가지 규칙이 있다. 우선 소등 시간. 소등시간이 되면 다들 자리에 눕거나 볼일이 있는 경우 조용하게 움직이게 된다. 알베르게를 떠나야 하는 시간도 정해져 있다. 순례자들이 머문 알베르게를 청소하고 다음 순례자들을 맞을 준비를 하다보니 그렇게 운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보통 아침 8시, 늦어도 9시까지는 알베르게를 떠나야 한다. 

공립 알베르게의 경우에는 많은 사람들이 머물다보니 이 규정이 엄격하게 지켜진다. 사립의 경우에는 알베르게마다 차이는 있지만 소등이나 체크아웃 시간이 좀 더 자유로운 편이다. 

 

 

이렇게 산티아고 순례길의 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생장을 출발해 피레네 산맥을 넘어 론세스바예스로 오는 첫 일정은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이 길을 통해 보고 듣고 느끼며 마주친 모든 것들이 힘들었던 순간들도 좋은 기억으로 만들어 주었다.

 

첫날부터 느낀 순례길의 매력에 내일은 어떤 길을 걷게 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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