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하군에서 하루 쉬고 순례길을 나서니 그 자체로 기분이 경쾌해졌다. 컨디션이 좋아진 것도 있겠지만 역시 순례길은 걸을 때 가장 기분이 좋고 마음도 편해진다. 배낭의 무게는 여전히 묵직하게 느껴지지만 내가 싸온 배낭의 무게를 짊어지고 길을 걸을 때 가장 본질에 충실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번 길은 도로를 옆에 두고 나란히 걷는 구간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길의 형태는 동일하면서 주위의 풍경만 변했다. 비록 차도가 옆에 있었지만 차들이 주로 다니는 메인도로는 아니어서 신경이 많이 쓰이진 않았다. 때때로 빠른 속도로 휙 지나갈 땐 놀라기도 했지만 주위 풍경을 충분히 즐기는 걸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첫 마을에 들어설 즈음 두 갈림길을 보여주는 표지판이 나왔다. 일단 마을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어떤 외국여자가 마을을 나오면서 말을 걸었다. 마을 쪽으로 가는 길보다 자신이 가려는 길이 더 좋다고 하는 것 같았다. 난 마을로 간다고 하니 마뜩찮은 표정으로 인사를 하며 지나갔는데, 그 모습에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느 길로 갈지는 내가 선택하는 것인데 그 여자는 마치 본인이 가는 길이 맞는 것처럼 얘기하니 말이다. 본인의 선호를 얘기할 수는 있지만 그걸 강요하는 건 실례가 아닐까.

 

 

마을로 들어가보니 특별히 눈에 들어오는 건 없었다. 까미노 표시가 되어 있는 방향으로 가자 쉼터가 보였고, 잠시 쉬면서 어떤 길로 갈지 생각해보았다. 두 코스 모두 괜찮아보였는데, 둘다 오늘 걸을 거리로는 짧았고 길을 지나서 더 가기에 어디가 좋을지를 기준 삼게 됐다.

 

 

여기서 바로 쭉 가는 길은 차도 없이 명상과 고독에 좋은 길이라 나와 있어 끌리긴 했지만 중간에 마을 없이 20킬로 넘게 가야해서 그 코스를 선택하기엔 무리함이 느껴졌다. 그래서 다른 코스로 가기로 결정하고 다시 마을입구로 나와 걷기 시작했다.

 

 

차도가 옆에 있었지만 반대편에는 나무들이 일렬로 줄지어 늘어서 있었고, 그 위에 맑고 파란 하늘이 멋진 색감을 이루고 있었다. 이런 길을 걷고 있는 것 자체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눈에 보이는 풍경에 연신 감탄을 하며 걷다 보니 마을 하나가 나왔다. 거기서 어제 보았던 한국인 그룹을 만났다. 잠시 쉬고가라고 하길래 잠깐 앉았는데, 알고 보니 그곳은 한국어 메뉴가 있는 바였다. 메뉴판을 신기해하며 쳐다보고 있는데 거기엔 신라면도 끓여준다고 나와있는게 아닌가! 그들은 이미 주문을 한 상태였다. 나온 라면을 보니 제법 먹음직스럽게 보이더라. 한국인들이 얼마나 많이 다니면 이렇게 라면까지 끓여줄까 하고 잠깐 생각하다 맛있게 먹고 있는 그들을 뒤로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그 다음 마을까지가 렐리에고스였고, 무려 13킬로를 중간에 쉴 수 있는 마을 없이 가야했다. 게다가 차도와 나란히 가는 건 전과 같았는데 나무가 계속 늘어서 있지는 않아서 한낮의 더위를 고스란히 맞으며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오히려 중간에 마을 없이 계속 걸을 수 있는 건 내게 좋은 시간이라 여겨졌다. 긴 시간 계속 걸으면서 자신에게 집중을 할 수 있으리란 기대감 때문이었다. 

 

걷다 보니 어깨가 아파왔지만 쉬기보다는 계속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좀 더 나의 한계를 시험해보고 싶었던 것일까. 중간에 점심이 될만한 것을 먹지는 않았지만 배가 별로 고프진 않았고 길게 걸으면서 순간순간에 집중해보고 싶었다. 나뭇잎이 바람에 휘날리는 소리, 저벅저벅 땅 밟는 소리, 그 외에 들려오는 자연의 소리들... 이런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한걸음 한걸음 나아갔다.

 

 

그러다 괜찮은 쉼터를 보았고 마침 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걸음을 멈추었다. 시간을 확인해보니 한시간 조금 넘게 걸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체감상으로는 두시간은 걸은 것 같았는데... 쉼터 주위의 풍경을 바라보며 휴식을 취하고 길을 나섰다. 

 

한참을 걸어도 마을이 보이지 않자 조금씩 지쳐가고 있을 즈음 건물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곧 마을이 나타났다. 렐리에고스였다. 드디어 도착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렐리에고스
렐리에고스

 

렐리에고스에 들어가보니 그 다음 마을까지 6킬로밖에 안 남은 걸 알게 됐다. 더 갈까 잠시 고민하다 여기에 머무는 게 여러모로 적당하다 여겨져 곧장 숙소를 잡으로 갔다. 관리인이 없길래 잠깐 들어가 시설을 살펴봤는데, 일단 화장실이 넓고 물이 잘 나와서 마음에 들었다. 지금까지 본 공립 알베르게 중에선 최고의 화장실이였다.

 

렐리에고스-알베르게
렐리에고스 알베르게

 

고민 없이 방을 잡은 후 빨래와 샤워를 하는데, 시간이 6시가 지나서 그런지 좀 춥게 느껴졌다. 씻고 나오니 따뜻한 게 먹고 싶었다. 마침 근처 식당에 야채 라자냐를 팔고 있었다. 원래 빠에야를 시키려다 가격이 비싸 라자냐를 시킨 거였는데, 보기에도 맛도 좋았다.

 

 

이로써 라자냐가 빠에야와 또르띠아에 이어 스페인에서 맛본 세번째 음식이 되었다. 새로운 음식을 접하는 건 외국 여행을 할 때 맛볼 수 있는 즐거움 중 하나다. 거기에 와인 한잔과 다크초콜릿까지 더해지니 만족스러운 저녁식사가 됐다.

 

이번 여정은 약간의 임의성이 더해졌다. 렐리에고스에서 한국인 그룹을 다시 만났을 때 반갑지만은 않았지만 이야기를 나누고 와인도 함께 마시며 시간을 보내니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어울리는 것에 벽을 치기보다 자연스럽게 만남을 가지며 길을 걷다보면 좀 더 풍부한 경험을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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