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에 들어와 20일 만에 휴식을 갖게 됐다. 전에 이라체 포도주 사건도 그렇고 이번 휴식도 그렇고 한번쯤 일정이 계획과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모두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일정이었다. 길을 걷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었다. 

 

이처럼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는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생긴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여기서는 길을 걷고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반복해서 하는 것 외에 다른 것에 신경쓸 게 거의 없어서 그때그때 느끼는 감정을 잘 들여다볼 수 있다. 

 

저녁때는 한국인들이 모여서 음식을 해먹고 왁자지껄 떠드는 것을 보았는데 나도 모르게 외로워지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고 그들은 각자 자기들의 방식대로 하고 있는 것일 뿐인데 왜 그랬을까? 외국인들이 아닌 같은 한국인들끼리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자기들끼리 친분을 과시하는 모습 때문에 따로 떨어져 있는 내가 소외된 것 같아 그런 감정이 들었던 것일까? 그러다 처음에 만났던 한국인 아줌마와 이야기를 나누고 이어 다른 한국남자가 얘기를 걸어 이야기를 하면서 그전에 느꼈던 외로움은 어느새 사라졌다. 아까의 외로움은 왜 사라진 것일까? 더이상 내가 소외당하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가?

 

이처럼 까미노에서는 나 자신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어떤 감정이 생기고 어떻게 변하는지도 잘 느끼게 되는 것 같다. 그 감정이 왜 생기는가보다 일어나는 감정을 잘 알아차리고 볼 수 있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 같다.

 

 

전날 호스텔에서 잘 때 늦게까지 자는 걸 생각하고 알람도 맞췄지만 이미 그 전에 깼고, 그 상태로 좀더 누워있다 일어났다. 늦게까지 잠이 안오자 일어나서 어제 제대로 못봤던 마을 초입의 성당까지 가보기로 했다. 호스텔에는 12시까지 있을 수 있어서 여유있게 준비를 하고 길을 나섰다.

 

사하군-호스텔
사하군 호스텔

 

시간은 오전 9시 정도. 어젯밤 캄캄할 때 왔던 길을 밝을 때 다시 되돌아가 보는 것이었다. 그 길을 가면서 사하군으로 들어오는 순례자들을 만났다. 이 시간에 도착한 것을 보니 아침 7시 정도에는 출발을 했다는 얘기인데 참 부지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과 인사를 나누며 성당으로 향했다. 역시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다. 조금 빠른 걸음으로 갔는데도 30분이 넘게 걸렸다. 어제는 길도 잘 분간이 안되는 밤에, 그것도 초행길로 온 것이니 훨씬 더 길게 느껴졌을 터였다.

 

 

밝을 때 성당의 형체를 뚜렷히 보게 되니 그것 자체로 좋았다. 성당 자체는 특별한 것이 없었으나 그 주변에 나무가 우거져 있고 두개의 기둥처럼 세워져 있는 조형물이 있어서 나름 구도가 멋져 보였다. 깜깜할 땐 몰랐는데 낮에 와서 보니 그 길도 표시가 여러군데 되어 있어서 헤맬 길은 아니었다. 역시 밝을 때 다녀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것을 느끼며 사하군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배가 고파 숙소 근처의 상점에 들러 먹을 것을 샀는데, 가게아저씨가 국적을 묻더니 갑자기 한국말을 하는 게 아닌가. 역시 한국인들이 많이 왔다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갈때 아저씨가 '잘가요!'라고 인사하자 나도 모르게 '네'라고 대답했는데, 그게 웃기기도 했다. 

 

숙소로 들어와 사온 음식을 먹고 일정을 생각하다가 여기서 쉬지 않고 더 갈까 잠시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할 게 있었고 몸도 쉬어주는 게 낫다는 생각에 쉬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 호스텔 맞은편의 알베르게로 숙소를 옮겼다.

 

사하군-알베르게
사하군 알베르게

 

12시가 안된 시간에 들어가니 내가 첫번째 손님이었다. 오늘은 원래 힘쓰는 일은 안하려고 했는데 세탁비가 비싸 빨래는 그냥 손으로 하기로 했다. 그정도는 괜찮았다. 빨래를 마치고 주변 정리도 할 겸 잠시 앉아 휴식을 취했다.

 

그러는 동안 하나둘 순례자들이 숙소로 들어왔고, 거기엔 처음보는 한국인 모자도 있었다. 할 것을 마치고 음식준비를 하는 아줌마와 잠깐 얘기를 나눴다. 그녀는 발상태가 안 좋아 까리온에서 버스를 타고 왔다고 했다. 손질하던 멜론도 맛보게 해줬는데 맛이 무척이나 좋았다. 그렇게 얘기를 나누고 마을 주변 탐방을 나섰다.

 

 

사하군은 성당이 많은 곳이었다. 각 성당마다 특색이 있어서 이리저리 둘러보며 감상을 했다. 그러다 전에 순례길에서 본 덴마크 친구를 만났다. 그도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펍에도 다녀왔는지 좋다고 얘기를 해주었다.

 

 

웬만큼 둘러봤다 싶어서 이젠 마트를 가려고 했는데 길을 좀 헤맸다. 마트가 눈에 띄는 곳에 있지 않아 주변 사람들에게 묻기도 하면서 한참을 찾았다. 가서 필요한 것들만 산다고 샀는데 다 먹을 거였다.

 

 

숙소로 돌아가보니 사람들이 많아져 있었고 특히 처음 보는 한국인들이 눈에 띄었다. 한 아저씨는 급한 일정 때문에 길게 걸어왔다고 했고 나중에 본 한 무리의 사람들은 들어올 때부터 시끌벅적하더니 요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때 이 숙소의 일체형 구조가 안 좋다는 것을 알았다. 침대 바로 옆에 조리공간이 있으니 냄새가 다 퍼지고 요리하는 소리와 사람들 얘기하는 소리가 그대로 들려서 침대에서 조용히 있을 수 없었다. 

 

사온 음식을 식탁에서 간단히 먹고 나머지는 밖으로 나와 광장이 있는 곳으로 가서 먹었다. 거기서 놀던 꼬마애들 중 어린 여자아이가 빼꼼히 몇 번을 쳐다보더라. 외국인, 그것도 동양 사람을 본 거니 신기했을지도.

 

다시 숙소로 돌아갔을 때도 여전히 요리판이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아래층으로 내려가 의자에 앉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지나다니는 몇몇 사람들과 대화를 나눴다. 낮에 봤던 아줌마는 반완주증명서를 받아왔다고 보여주었다. 그리고 요리하던 무리에 있던 한 남자는 오늘 오는데 다른 사람들과 같이 택시를 잡고 왔다면서 들렸던 대도시마다 중국인 뷔페를 갔다고 했다. 맛도 괜찮고, 각 도시마다 뷔페의 맛 차이도 있다고 설명해주면서. 얘기를 들으면서 그렇게 함께 다니면 정보는 풍부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층도 밤 9시가 되서 문을 닫는다고 하길래 침대로 돌아갔다. 시끄럽게 떠드는 아이의 소리에 하던 것을 접어두고 내일 일정만 확인을 하기로 했다. 내일은 가다가 두갈래로 길이 나뉘게 되는데, 어디까지 갈지 가늠이 잘 안되서 일단 가면서 결정하기로 하고 잠을 청했다.

 

사하군에서의 휴식은 몸을 편히 쉴 수 있게 해주었고 전날의 피로를 잘 해소할 수 있었다. 알베르게의 개방형 구조로 시끄러움을 감수해야 하는 건 있었지만 처음 보는 사람들을 만나고 얘기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기도 했다. 

 

 

이제 낼부터 다시 길을 나서야지. 역시 걸을 때가 가장 기대가 되는구나! 벌써부터 몸이 근질근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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