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전날처럼 어둠 속에서 자그마한 불빛들이 여기저기를 비추고 있었다. 일찌감치 준비를 마친 순례자들이 하나씩 자리를 떴고 주위은 다시 조용해졌다. 

 

눈을 뜬 김에 어제 마저 쓰지 못한 일기를 쓰기로 했다. 원래 일기는 그날 바로 쓰려고 했는데 순례길을 걸어서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다. 일기를 쓰다 졸음을 못 이기고 그만 잠들어 버렸다(이후로도 이런 날들이 많았다). 

 

잠깐 바깥바람을 쐬려고 옷차림을 가볍게 하고 숙소를 나왔다. 밖은 아직 어두컴컴했고 하늘엔 아직 달이 떠 있었다. 숙소가 있던 수도원 건물을 천천히 돌다가 추위가 슬슬 느껴지기 시작해 숙소 앞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숙소로 들어가는 문이 잠겨져 있는게 아닌가! 당황하면서 계속 열어보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른 시간이라 돌아다니는 사람도 없어서 낭패다 싶긴 했지만 일단 근처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옷도 얇게 입은 데다 날은 점점 추워져 초조해하던 차에 갑자기 숙소문이 열렸다. 스윽 나온 사람은 한국인 아저씨였다. 구원자를 만난 기분이었다. 들어가기 전에 이 문이 밖에서는 안 열린다는 것을 알려드리고 얼른 숙소로 들어갔다. 내 침대로 들어가 따뜻한 기운을 느끼며 일기를 마저 쓰기 시작했다. 

 

곧 날은 밝아지기 시작했고 남은 순례자들은 하나둘씩 일어나 길을 떠날 준비를 했다. 일기을 쓰다보니 시간이 생각보다 길어져 거의 마지막으로 짐을 챙겨서 숙소를 나왔고 어제 저녁을 먹었던 식당으로 가서 간단하게 아침을 먹었다. 

 

아침을 먹으니 든든해졌다. 식당을 나와 발에 물집이 잡힐까봐 바셀린을 꼼꼼히 발라주고 나서야 길을 나섰다. 론세스바예스를 막 벗어나는 길목에 산티아고까지 790킬로미터가 남았다는 표지판이 보였다.

 

 

날은 어제보다도 맑고 쾌청했다. 상쾌한 기운이 온 몸을 휘감았다. 출발하자마자 숲길이 나왔다. 아침기운 가득한 숲은 신선한 공기를 내뿜고 있었고 걷는 발걸음을 가볍게 해주었다.

 

 

얼마 가지 않아 작은 마을이 나왔다. 집집마다 붙어있는 담벼락에 그려진 벽화들이 눈에 들어왔다. 글자로 벽을 도배해놓은 벽화가 있었는데, 크게 써있는 말이 뭘까 궁금해하다 옆에 영어가 같이 적혀져 있는 것을 보고 이쪽 지역의 환영 인사의 말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옆에 길안내를 해주는 지도와 재미난 형상을 그린 벽화들도 눈길을 끌었다.

 

 

 

벽화에 이어 아기자기한 집들이 나타났다. 동화 속에 나올법한 세로 지붕을 한 2층짜리 집이 인상적이었다. 예쁜 집들과 골목이 발걸음을 자꾸만 붙잡게 만들었다.

 

 

 

마을을 지나니 성당건물이 하나 있었다. 그냥 지나치기 아쉬워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성당 안에는 스테인글라스로 이루어진 유리창문이 아름답게 빛났고, 천장에는 예수의 이야기를 담은 듯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성당을 나와 조금 걸으니 그때부터는 들판이었다. 푸른 하늘 아래 초록빛을 가득 머금고 있는 나무와 언덕 그리고 그 가운데 내가 걸어갈 길이 정갈히 나 있었다. 그런 풍경을 바라보며 걷는 것은 그 자체로 힐링이었다.

 

 

 

가는 길에 작은 비석과 그 앞에 한아름의 꽃이 놓여져 있었다. 누군가를 추모하는 의미 같았다. 그 비석마저 주위의 풍경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었다.

 

 

한참을 걷다보니 슬슬 배가 고팠다. 마침 눈앞에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고, 마을입구에 있는 바를 발견했다. 여기서 식사하면서 잠깐 쉬고 가야겠다고 결정했다. 한쪽에 자리를 잡고 무거워진 배낭도 털썩 내려놨다.

 

 

 

산티아고 순례길 이야기 <6>

우리나라에서 '바(BAR)'라고 하면 흔히 다양한 종류의 술을 파는 곳이라고 생각하지만, 이곳에서의 '바'는 빵과 간단한 음식 그리고 맥주와 음료 등을 파는 간이음식점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바는 산티아고 순례길 곳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큰 마을은 물론 작은 마을에도 보통 바가 한개씩은 있고 이곳에서 식사를 해결하는 순례자들도 많다.

 

 

바에는 먼저 와서 쉬고 있는 순례자들이 여럿 보였다. 그 중에 피레네 산맥을 넘으면서 내게 먹을 것이 없냐고 물어봤던 마이클도 있었다. 그때 잠시 같이 걸으며 그가 아일랜드에서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자기는 게이라고 했다. 사랑하던 친구가 있었는데 일찍 죽었고 그 친구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오고 싶어 해서 본인이 대신 왔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렇게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는 지나가던 사람과도 쉽게 말을 붙이며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마이클과 바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한 무리의 여자들은 알고 보니 마이클의 어머니와 여자형제들이었다. 그들과도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빵과 음료를 시켜 자리에 앉았다. 언뜻 사람이 살지 않는 듯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을 둘러보며 배를 채웠다. 뒤에 오던 순례자들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인사도 나누면서 잠깐의 휴식을 즐겼다.

 

다시 길을 나섰다. 마을을 지나자 내리막길이 시작됐다. 어제 피레네 산맥과 비교하면 내리막길의 경사는 완만하여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다. 곧 숲길이 이어졌고 울창한 나무들은 한낮의 뜨거운 태양으로부터 그늘막을 만들어주었다. 

 

 

이 시기의 산티아고 순례길은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했지만 한낮에는 뜨거운 태양이 열기를 내뿜어 순례자들을 지치게 만들었다. 숲길과 언덕길이 반복되는 오후의 일정은 온탕과 냉탕을 번갈아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길에서 만난 고양이도 뜨거운 햇볕에 목이 마른지 우물물로 연신 목을 축이고 있었다.

 

 

그렇게 걷다가 지칠무렵 표지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고, 가까이서 본 표지판에는 오늘의 목적지인 수비리가 적혀있었다. 그제서야 살 것 같았다. 힘을 내서 조금 더 걸으니 마을의 모습이 보이며 수비리로 들어가는 다리 앞에 와 있었다.

 

수비리
수비리

 

다리를 건너려는데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올려다보니 다리 근처의 한 건물에서 생장에서 같이 출발했던 순례자 중의 한명이었다. 이미 도착해 그곳에 숙소를 잡고 있다가 나를 발견한 것이다. 본인이 머물고 있는 곳이 시설이 괜찮다고 하면서 추천을 해 주었는데 사전에 생각해 놓은 숙소가 있었기에 인사를 하고 다리를 건넜다(이 선택이 이때까지는 잘못된 결정인지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렇게 마을로 들어서고 숙소부터 찾았다. 생각했던 숙소는 마을 안쪽에 들어가 있었고 한눈에 발견할 수 있었다. 한 쪽 벽면에 가리비와 함께 큼지막한 글씨가 써 있었다. 그곳의 이름은 '알베르게 무니시팔'이었다.

 

수비리-알베르게
수비리 공립 알베르게



산티아고 순례길 이야기 <7>

산티아고 순례길에는 알베르게라고 불리는 순례자 숙소가 있고, 공립과 사설 알베르게로 나뉘어 있다고 앞서 언급했다. 그중 공립 알베르게는 숙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 '무니시팔(MUNICIPAL)' 이라는 명칭이 붙어 있다. 그래서 공립 알베르게에 머물고 싶으면 '무니시팔'이 적혀 있는 곳을 찾는 것도 한 방법이다. 무니시팔은 '공립'을 뜻한다. 

 

 

안내하는 곳으로 들어가 여권을 내밀고 도장을 찍은 후 자리를 배정받았다. 어제와 달리 오늘은 1층이었다. 숙소는 2층 침대들이 여럿 배치되어 있는 구조였다. 전날 론세스바예스의 숙소를 봐서 그런지 여기는 뭔가 낡고 부실해 보였다. 살짝 찜찜한 마음이 들었지만 짐을 풀고 우선 씻기로 했다. 

 

씻고 나니 다시 기운이 났다. 숙소와 마을을 한번 둘러보기로 했다. 이곳 숙소는 자는 곳과 식사를 하는 곳이 분리되어 있었다. 식사를 하는 곳으로 들어가보니 큰 책상과 의자들이 여럿 놓여있었고, 검은 머리색의 여자가 앉아 뭔가를 적고 있었다. 언뜻 보니 일본인 같아 보았는데 인사를 해보니 한국인이었다. 일찌감치 도착해 일기를 쓰고 있다고 했다. 잠시 얘기를 나누다가 숙소를 나왔다. 

 

숙소 주위에는 집과 상점으로 보이는 건물들이 띄엄띄엄 위치해 있었고 마치 전원도시 같은 느낌을 주었다.

 

 

한바퀴 돌고 숙소로 돌아오니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전날 론세스바예스에서 맞은편 침대를 쓰던 세라였다. 많은 얘기를 해본 건 아니었지만 독일에서 왔다는 것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도 한번 봤다고 이렇게 다시 보니 반갑게 느껴졌다. 세라도 밝게 웃으며 인사해주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순례자들이 연이어 도착해 짐을 풀었고 어느덧 숙소는 만석이 되었다. 한쪽 구석에 아까 봤던 한국인 여자도 보였다. 이 공간 안에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게 여전히 신기하게 느껴졌다. 

 

알베르게 소등시간인 밤 10시가 다가오면서 사람들이 하나둘씩 잠자리에 들기 시작했다. 숙소에 도착해 별로 한 것도 없는것 같은데 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오늘도 결국 일기는 다 쓰지 못하고 다음날 일어나 마무리하기로 했다. 불이 꺼지고 어둠 속에서 가만히 오늘 하루를 돌이켜보다가 어느새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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