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은 많이 걷지 않고 쉬어가는 날로 정했습니다. 일단 물집으로 인해 오래 걷기 힘든 상태였기 때문에 쉬면서 회복하는 시간을 가지려 했습니다. 그리고 쉬면서 와인을 마시고 취기를 편안하게 느끼고 싶기도 했습니다.
에스테야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이라체 수도원이 있는데, 수도원 초입에 순례자들을 위해 제공되는 와인 수도꼭지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와인을 받은 다음 근처 마을에서 휴식을 취하며 즐길 예정이었죠.
이라체 수도원은 금방 도착했고, 와인을 받을 수 있는 곳에는 일찍부터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이곳에서는 와인뿐만 아니라 물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사전에 물통이나 용기를 준비해서 필요한 것을 담아가면 좋습니다. 순례자들을 위한 이런 서비스는 순례길에서 맛볼 수 있는 하나의 즐거움이 되기도 합니다.
이전 순례길에서는 수도원 내부를 살펴보지 않고 지나쳤는데, 이번에는 여유도 있고 마침 수도원이 열려 있어 내부를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이라체 수도원의 내부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은은하게 오랜 세월의 흔적을 발하면서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습니다.
기분좋게 수도원 구경을 하고 일찌감치 숙소를 잡으러 갔습니다. 숙소로 머물 곳은 아예기라는 마을이었는데요. 이전 순례길에서 길을 되돌아오는 일이 한 번 있었는데, 그때 머물렀던 곳이었습니다. 당시 머무르며 좋은 기억을 갖고 있어 이번에도 묵으려고 간 것이었습니다.
아예기는 산티아고 순례길 프랑스 코스를 출발하고 나서 100km를 지나는 지점이기도 해서, 그것을 기념하는 스탬프를 받을 수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추억은 추억으로 남겨두는 게 좋은가 봅니다. 그곳 관리인은 체크인하면서 시종일관 불친절한 모습을 보여 마음을 불편하게 했고, 예전과 달리 주방도 이용하지 못하게 하면서 제한을 두는 게 많아졌습니다. 그 외에도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고, 이런 것들이 겹치니 이곳에 머물지 않는 게 낫다는 판단이 들어 환불을 받고 나왔습니다.
무거운 배낭을 들고 다시 움직여야 했지만 그렇게 나오니 마음은 훨씬 편했고, 전날 머문 숙소에 가는 걸로 결정했습니다. 그곳이 시설도 깔끔하고 비용도 저렴해서 굳이 다른 곳을 알아보려 하지는 않았죠. 그 숙소에 가니 관리인이 위치가 좋은 배드를 정해줘서 기분이 좋기도 했습니다.
이날은 양말을 사기도 했습니다. 근처에 스포츠 용품 체인점인 데카트론이 있었고, 그곳에 들러 내가 원하는 형태의 양말을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물집과 앞으로 닥칠 추위에 대비한 양말을 괜찮은 가격에 살 수 있어 좋았습니다.
이렇듯 순례길에서도 필요한 물품이 있으면 적절한 곳을 찾아 얼마든지 구매할 수 있기 때문에 떠나기 전에 모든 것을 준비할 필요는 없습니다. 정말 필요한 것만 딱 챙기고 나머지 것들은 현지에서 조달하는 방식이 배낭 무게도 줄이고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숙소에서 식사를 하고 나서 잠시 쉬다가 밖에 나가 돌아다니며 마을 구경을 했습니다. 전날 보지 못한 광경을 볼 수 있어 좋기도 했지만 사실 휴식이 필요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런 경우에는 많이 돌아다니는 것보다 잘 쉬어주는 게 낫겠다는 것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이날 또 하나의 새로운 경험은 마트에서 셀프계산대를 사용해본 것이었습니다. 계산줄이 길어서 살펴보다 셀프계산대를 발견한 것이었는데, 처음 해보는 것이라 살펴보기만 하려고 하다가 언어를 영어로 바꾸고 천천히 해보니 계산을 할 수 있었습니다. 사소한 것이지만 이런 것 하나가 즐거움과 성취감을 주기도 했습니다.
숙소로 돌아와 씻고 나서 드디어 물집을 터뜨리기로 했습니다. 바늘이 없어 사실 물집을 그냥 둔 것이기도 했는데 생각해보니 갖고 있던 손톱깎이로도 물집을 터뜨릴 수 있음을 알고 그것을 이용했습니다. 물집은 기다렸다는 듯이 터지며 물이 흥건이 흘러나왔고, 그렇게 처치를 하고 나니 약간의 통증은 있었으나 물집으로 인한 아픔은 완화가 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