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월의 어느 일요일 오후. 소양강 스카이워크 앞에 모인 사람들의 표정은 살짝 들떠 있었다. 우려와는 달리 하늘은 맑았고 날마저 포근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눈이 내려 땅이 얼까봐 전기자건거 ZET를 타려던 것도 취소하고 걸어서 움직이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진행해도 될 걸 하는 아쉬움을 조금은 담고 시작한 도보투어는 그러나 생각보다 성공적(?!)이었다.



코스의 시작은 근화동 당간지주. 당간지주는 절에서 깃대를 고정시키기 위해 세운 돌기둥을 말하는데, 스카이워크 근처에 이러한 당간지주가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당간지주를 보러 들어가는 길이 정원처럼 잘 가꾸어져 있어 예쁘다는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당간지주 옆에 사색의 길이라는 코스가 만들어져 있는 것을 누군가 발견했다. 전에 미처 살펴보지 못했던 건데... 그런데 그 코스가 내가 예상한 것과 거의 일치하는 게 아닌가! 역시 이쪽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생각하는 게 비슷하나보다.



소양강 스카이워크 근처에는 볼거리가 많다. 그 중 하나가 소양강 처녀상. 처녀하면 여리여리할 것이라는 편견(?)과 달리 소양강 처녀상은 그 모습에서 조금은 웅장함마저 느껴진다. 어떤 의도로 이런 처녀상을 세웠는지 갑자기 궁금해진다. 소양강 처녀비 아래쪽에 있는 버튼을 눌러 소양강 처녀노래를 잠시 감상해본다. 여기서 같이 갔던 사람들 간의 세대차이가 느껴진다. 당연히 아는 사람, 잘 모르지만 이름은 들어본 것 같다는 사람. 나는 소양강 처녀를 잘 알고 있었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가다보니 멀리 큰 다리가 나온다. 소양2교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 62공병대대가 이곳에 다리를 건설하였는데, 전쟁 중 이 부대의 지휘관이었던 Forney 대령이 전사한 것을 기리는 의미로 Forney Bridge로도 불렸다. 밤이 되면 소양2교는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빛을 비춘다. 춘천의 랜드마크로도 손꼽히는 이곳에서 추억을 한장 남긴다.



춘천에는 시내와 호수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정자가 하나 있다. 소양정이 바로 그것이다. 소양정으로 들어가는 입구 주변에 눈에 띄는 비석들이 보인다. 이곳에 있는 비석들은 옛 관리들의 공덕이나 업적을 기려 세웠던 것들이라고 한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것들을 한데 모아둔 것. 하나하나 살펴보다 제일 구석에 다른 모양의 비석이 눈에 띈다. 일제 때 친일파였던 이범익을 단죄하기 위해 세웠다고 설명이 나와 있다. 그런데 그 옆에 조그만 비가 하나 더 있다. 다 한문으로 써 있어서 어느 것이 단죄비인지 의견이 분분했다. 내가 한번 알아보고 알려주겠다고 약속을 하고 나서야 소양정으로 가는 길에 오를 수 있었다.




제법 높은 곳에 위치한 소양정이 눈에 보일 무렵, 비석 하나가 우리를 맞았다. 춘천절기 전계심 묘비였다. 묘비의 주인공 전계심은 조선시대의 기생인데, 이 비석이 세워진 스토리가 춘향이와 이몽룡의 그것과 조금은 닮아 있었다.



이제 소양정이 눈앞에 들어온다. 소양이라는 이름으로 볼 때 이곳은 정자라는 얘긴데, 사실 정자는 1층으로 되어 있어야 정자란다. 이곳은 계단으로 올라가는 누각 형태로 되어 있어 정체성에 약간의 논란이 있기도 하다. 여기서 중요한 건 아니니 넘어가자. 정자에 오르면 많은 글들이 걸려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만큼 이곳을 들렀던 문인들이 많았다는 얘기. 우리가 잘 아는 정약용과 김시습도 이곳에 올라 시를 지었다고 한다. 다산 선생은 여행답사 차 이곳에 자주 들렀다고 하는데, 그래서 다산길이라는 코스 안에 소양정이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정자에 올라 멀리 소양강을 바라보며 시 한편 읊어 봐도 꽤나 운치가 있을 것 같다.



소양정을 내려와 번개시장으로 들어왔다. 번개시장이라는 이름에는 유래가 있다. 예전에 서면에 살던 사람들이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와 새벽에 번개처럼 잠깐 장을 열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렇게 돈을 벌고 자식들 뒷바라지시켜 박사를 많이 배출시킨 곳이 바로 서면 박사마을이라는 설도 있다.



어느덧 여행의 중반부가 지나고 잠시 카페에서 몸을 녹이고 가기로 했다. 오픈한지 얼마 안 된 듯한 카페에는 젊은 남자 사장님이 혼자 음료를 만들고 있었다. 한잔한잔 너무 공들인 탓일까. 음료가 다 나올 때까지 한참이 걸렸다. 원래 예상시간대로 진행하려면 얼른 음료가 나와야 하는데... 하지만 그건 혼자만의 고민이었다.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고, 어느 순간 나도 시간에 대한 강박을 놓아 버린 채 이야기에 동참했다.

 


그렇게 1시간여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고 나오니 아까 들어갈 때 보지 못한 게 눈에 띈다. 커다란 개 조형물이 카페 앞에 있었던 것. 동행한 분의 이야기에 따르면, 돈을 버는 개라서 번개라는 이름이 붙여졌단다. 재미있다. 알고 보니 번개시장의 공식 마스코트이기도 했다.



다시 투어가 진행됐다. 다음 코스인 기와집길에 다다를 무렵 어느덧 하늘은 석양빛으로 조금씩 물들고 있었다. 기와집길에서 처음으로 들린 곳은 준상이네 집. 사실 기와집길은 겨울연가 준상이네 집 촬영지로 유명해진 곳인데 지금은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된 뒤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곳이다. 한때 춘천의 부자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다지만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동네 너머 세워져 있는 아파트단지와 대비되어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기도 한 곳이다.



그런데 준상이네 집으로 알고 찾아간 곳이 알고 보니 아니었다는 사실! 예전에 와봤다는 분의 안내에 따라 가보니 거기에 준상이네 집을 알리는 푯말(일본어로 되어 있었지만 위치상 그곳이었다)이 세워져 있었다. 그분이 아니었다면 엉뚱한 곳으로 알고 가버릴 뻔 했다. 집단지성의 힘을 느꼈던 시간! 그 옆에는 드라마 첫사랑을 찍었던 집도 볼 수 있다.

 

기와집길은 옛날 집들과 골목의 정취를 곳곳에서 풍기고 있다. 문득문득 나오는 고양이의 등장에 가끔 놀랄 수도 있다. 어디든 카메라를 들이대면 나름의 분위기 있는 모습이 찍히는 곳이다. 그래서 사진을 찍으러 많이들 오나 보다. 여기저기 둘러보다 예전에 미리 봐뒀던 장소로 발길을 옮겨 본다. 좁은 골목을 쭉 따라가다 그 끝에 갑자기 넓게 펼쳐지는 풍경을 만난다. 나름 전망 좋은 곳으로 이름도 붙여둔 곳. 그 반대편으로는 기와집길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해가 넘어가면서 석양에 비치는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렇게 기와집길 구경을 마치고 내려오다 독특한 골목을 만났다. 이곳 역시 같이 가신 분이 옛 건물들의 모습이 남아 있다 하여 와보게 된 것. 약국이며 세탁소 같은 곳들이 옛 간판을 달고 군데군데 자리잡고 있었다. 마치 영화 세트장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느낌.



그곳을 빠져나오니 공간이 넓게 펼쳐지면서 그 한가운데에 석탑이 하나 서 있다. 춘천 7층 석탑이다. 한국전쟁 때 심하게 훼손이 되었다가 근래에 다시 복원을 했다는 이 석탑 뒤로는 아파트 단지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그 모습이 대비되어 몹시나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보물로도 지정된 이 석탑 주변에는 이름 정도만 알려주는 조그마한 비석 외에 석탑을 셜명해 주는 문구가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석탑 하나만 딸랑 있는 느낌이라 좀 아쉬웠다. 그래도 석탑을 배경으로 사진을 남기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이렇게 히스토리 도보투어가 마무리됐다. 날씨를 고려하다보니 예정된 코스를 다 둘러보지 못해 아쉬움도 있었다. 다음 투어의 기회가 생긴다면 그때는 온전한 코스로 만날 것을 기약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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