팜플로나에서의 아침이 밝았다. 오늘은 일찍 나가고 싶었으나 준비를 하다보니 어느덧 8시가 넘어 있었다. 이전 마을에서는 숙소를 벗어나면 곧바로 순례길로 접어들었는데 팜플로나 같은 큰 도시에서는 시내를 빠져나오는 데만 해도 한참이 걸렸다. 게다가 길도 조금 헤매다 보니 겨우 도시를 빠져나왔을 때 이미 1시간 가까운 시간이 가버렸다.

 

 

그렇게 길을 떠나 들린 첫 마을에서 물을 사고 잠시 쉬었다. 오늘은 오래 가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통증으로 벌써 지치기 시작한 것도 있었지만 어제부터 빵으로 대충 끼니를 때우면서 부실하게 먹은 게 복합적으로 몸에 영향을 준 것 같았다.

 

 

점심 때가 되어 들린 마을에서 햄을 곁들인 샌드위치와 오렌지주스를 먹고 마실 게 더 땡겨 파인애플 주스도 추가로 먹었다. 그러고 나니 좀 기운이 났다. 이때부터 돈을 너무 아끼기보다는 먹을 것은 잘 먹어야겠다고 생각을 하게 됐다.

 

 

점심을 먹고 에너지를 충전한 후 오르막길을 계속 걷다가 언덕의 끝에 다다랐다. 눈에 익은 철제 조형물이 들어왔다. '용서의 언덕'이었다. 해발 760m 부근에 자리잡고 있는 이 곳에 오르면 자신을 용서해야 한다는 속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용서의-언덕
용서의 언덕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주위를 감상하며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높은 지대라 그런지 바람이 세차게 불었고 기분 좋게 만끽할 수 있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다 보면 오늘처럼 유난히 힘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 시원하게 바람이 불어주면 다시 걸을 수 있는 에너지를 주기도 한다.

 

 

용서의 언덕이 순례길에서 유명한 스팟인 만큼 여기서 머물다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쉬면서 얼굴을 마주치게 되는 순례자들과 부엔 까미노로 인사를 나눈다. 혼자 오래 걷다보면 자칫 얼굴이 경직되기 쉬운데, 이렇게 순례자들과 미소로 인사를 나누면서 얼굴도 한결 부드러워지고 마음이 따뜻해진다.

 

많은 사람들을 연속적으로 마주칠 때는 인사를 계속 하게 되는 경우도 있어 좀 부담될 때도 있다. 그럴 때 억지로 인사할 필요는 없는데, 시간이 지나다 보면 자연스럽게 대처(?)하게 된다.

 

 

용서의 언덕을 지나니 바로 가파른 내리막이었다. 발의 통증이 있을 때는 오르막보다 내리막이 더 고통스럽다. 그래도 잘 쉰 덕분인지 통증을 견뎌가며 조심스레 한발씩 내딛어 길을 걸어갔다.

 

 

 

그렇게 한참 가다 우떼르가라는 마을에 다다랐다. 시간은 어느덧 오후 3시를 가르키고 있었다. 한낮의 햇볕은 몹시 뜨거웠고 통증은 여전히 계속되어 여기서 마무리를 할까 잠시 고민을 했다. 숙소와 함께 딸린 바에는 많은 순례자들이 맥주를 시원하게 마시며 일정을 마무리하는 모습이었다. 시원한 물을 마시며 잠시 쉬다가 아직 마무리하기에는 조금 이른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원래 생각을 했던 마을까지 가기로 결심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우떼르가
우떼르가

 

그런데 아뿔싸! 길을 서두른 탓인지 순례길이 아닌 찻길로 빠지고 말았다. 처음에 마을을 나설 때는 아스팔트 길이 있길래 별 생각없이 그럴 수도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계속해서 사람이 보이지 않아 이상하다 싶다가 저 위 언덕으로 사람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제서야 길을 잘못 들어온 것을 알았다.

 

찻길로도 목적지까지 갈 수는 있을 것 같았지만 순례길을 놔두고 계속 가기에 찝찝한 느낌이 들었다. 결국 길도 나 있지 않은 황무지 언덕을 낑낑대며 올라가 겨우 순례길로 다시 진입을 했다. 막상 순례길로 들어가니 애초에 마을에서 나올때부터 순례길로 나오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크게 들었다.

 

한동안 감정에 사로잡혀 있다가 이미 지난 것에 너무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두르다 주위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출발하여 놓친 게 있다면 그것을 교훈삼아 앞으로 걸으면 된다고 위안을 했다. 그렇게 마음을 진정시키니 다시 눈앞의 순례길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렇게 오후의 무더위를 뚫고 오늘의 목적지 뿌엔떼 라 레이나에 도착했다. 마을에 막 도착했을 때 눈에 들어온 것은 알베르게 하나와 호텔간판이 붙어 있는 오래된 건물이었다. 설마 이게 전부인가 싶어 갸웃거리다 좀 더 가보니 건물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이미 통증으로 많이 지친 상태라 먼저 숙소를 찾아 쉬고 싶었다. 사전에 생각해둔 숙소는 마을 외곽의 한적한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마을을 지나고 한참을 걸어 언덕을 올라가 겨우 숙소를 발견했다. 

 

뿌엔떼-라-레이나-알베르게
뿌엔떼 라 레이나 알베르게

 

더 이상 움직일 힘이 없었지만 깔끔하고 조용한 분위기의 숙소를 보니 기운이 조금 생겼다. 체크인을 하고 배정된 침대에 짐을 내려놓고 샤워부터 했다. 시원한 물로 씻고 나니 좀 살 것 같았다. 그제서야 아까 지나쳐버린 마을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숙소가 마을 중심부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기에 내려오는 길에 마을의 전경을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뿌엔떼 라 레이나는 생각보다 규모가 있는 마을이었다. 가까이서 보니 이색적이고 유럽 느낌이 물씬 풍겼다.

 

뿌엔떼-라-레이나
뿌엔떼 라 레이나

 

 

마을로 들어가는 다리에서 익숙한 실루엣을 보았다. 처음에 같이 순례길을 출발한 한국 친구들이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함께 저녁을 먹기로 했다. 오늘만큼은 뭔가 제대로 된 음식을 먹고 싶어서 빠에야를 파는 곳으로 갔다. 

 

스페인에 가면 꼭 먹어볼 음식으로 꼽히기도 하는 빠에야는 쌀로 만든 일종의 볶음밥이다. 그동안 빵만 계속 먹어서 밥이 그리웠다. 곧 나온 빠에야를 보고 드디어 밥을 먹게 되었다는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기대에 미치지 못하기도 했고 먹다 보니 좀 질리는 느낌이 있었다. 그래도 밥을 먹어서 그런지 든든했고 나중에 다른 곳에서도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빠에야
빠에야

 

식사를 마치고 마을을 둘러 보면서 필요한 것들을 구입하기도 했다. 곧 날이 어두워졌고, 어둠 속에서 조명이 비친 마을의 모습도 예뻤다. 발에 통증은 여전히 느껴졌지만 그대로 가기에는 아까웠다. 한참을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충분히 구경하고 나서야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숙소로 돌아와 발을 보니 물집 잡힌 곳이 퉁퉁 부어있었다. 아까 신나게 돌아다니면서 물집을 더 키우지 않았나 생각하며 물집을 터뜨리기로 했다. 더이상 버티는 것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쓰라린 고통을 참아가며 물집을 남김없이 터뜨리고 침대로 돌아와 누웠다. 피로감이 확 몰려왔다. 오늘 여기까지 온 게 무리한 건 아니었나 싶기도 했지만 그래도 잘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반가운 사람들도 보고 밥도 먹게 되었으니까. 

 

점점 눈꺼풀이 무거워지자 내일을 기약하며 푹 자기로 했다. 고단했지만 보람이 느껴지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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