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 3일차. 오늘은 산티아고 순례길에 있는 도시 중 하나인 팜플로나로 들어가는 일정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에는 수많은 마을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 도시라 불릴 만한 곳들이 몇 군데 있다. 대부분 규모가 크고 유서가 깊은 도시들이다. 그 중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도시가 오늘 가게 될 팜플로나다. 순례길을 걸은지 아직 3일밖에 안 됐는데 벌써 도시가 그리웠던 걸까. 왠지 모르게 설렘이 느껴졌다.

 

간밤에 힘든 시간을 보냈다. 머문 숙소가 공립이었기 때문에 가격은 저렴했지만 그만큼 시설도 부실했다. 낡아보이는 2층 침대가 겉으로 볼 때는 잘 몰랐지만 실제로 위아래로 사람이 누워있으니 삐걱거림이 심했다. 내 위층에는 건장한 스페인 남자가 차지했는데, 이 친구가 밤새 뒤척거리고 게다가 심한 코콜이까지 하는 바람에 그 움직임과 소리가 나한테 고스란히 전달이 되었다. 불면의 밤을 지새우다 어느 순간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그렇게 잤는데 컨디션이 좋을리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물집이 하나 잡히고 종아리 부분에는 통증이 느껴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걸을 때는 잘 몰랐는데 그 후유증이 이제서야 나타난 것 같았다. 이 일로 앞으로 숙소를 정할 때는 공립이거나 가격이 싸다는 것에 현혹(?)되지 말고 다음날 길을 걷는데 지장이 없도록 잘 쉴 수 있는 곳인가를 최우선적으로 살펴봐야 된다는 교훈을 얻었다.

 

 

짐을 한창 싸며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어제 인사를 나누었던 세라와 함께 동행을 하고 있는 듯 보이는 순례자가 같이 아침식사 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크게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같이 먹어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준비를 마치고 함께 숙소를 나서려고 하는데, 누군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미국 펜실베니아에서 온 제프였다. 제프도 론세스바예스 숙소에서 잠깐 인사를 나눈 순례자였다. 아까부터 짐은 다 싼거 같은데 왠지 바로 가지 않고 서성거리는 폼이 같이 식사를 하고 싶었서 그랬던 거였다. 사실 론세스바예스에서 봤을 때 그렇게 좋은 인상을 받지는 않아서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냥 가라고 하기도 뭐하고. 엉겹결에 제프도 식사대열에 합류하게 됐다.

 

숙소 근처에 있는 바에 들어가자마자 김이 모락모락나면서 맛있는 빵냄새가 가게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갑자기 식욕이 확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뭘 시킬까 하다가 다른 사람들이 순례자 음식이라 적힌 메뉴를 선택하는 것을 보고 나도 같은 것을 시켰다. 

 

초코빵과 오렌지쥬스, 차가 함께 나왔는데 맛은 괜찮았지만 양이 좀 적었다. 막상 먹고 나니 식욕이 더 생겼나보다. 테이블에는 나와 세라 그리고 세라의 동행자와 제프 외에 한 노부부도 함께 자리했다. 세라가 길을 걸으면서 알게 된 사람인 듯 했다.

 

잠깐씩 얘기할 때는 괜찮았는데 막상 이렇게 자리를 잡고 있으니 모르는 사람도 있어서 그런지 얘기가 잘 나오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세라와 동행한 사람이 태국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딱 봤을 때는 한국인이가 싶기도 했는데. 

 

 

식사를 마쳤는데도 다른 사람들은 아직 갈 생각이 없어보였다. 함께 왔던 제프도 별 얘기 없이 미적거거리며 있었다. 더 지체하고 싶진 않아 먼저 간다고 인사를 하고 나왔다.

 

사전에 일정을 살펴봤을 때 오늘 순례길은 별로 험하거나 경사진 길은 없었다. 마을을 나오자마자 평탄한 길이 쭉 이어졌다. 날씨는 화창했고 하늘은 새파란 빛을 선명하게 띠고 있었다. 일어났을 때 피곤하고 가라 앉은 기분이 상쾌한 아침 기운에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길은 숲길과 평지가 번갈아가며 이어졌다. 걷다 보니 돌로 예쁘게 포장된 길도 나오고, 저멀리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들이 보였다. 곧 작은 성당도 볼 수 있었다. 잠깐 쉴겸 들어가서 구경을 하고 나왔다.

 

 

이번 순례길이 대부분 평지라 걷기에 힘든 길은 아니었지만 이전과 다르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힘들어졌다. 물집이 잡힌 부분이 계속 땅에 닿으면서 그때마다 고통이 심해지는 것이었다. 약간 잡힌 물집이어서 가볍게 생각했는데 이렇게 계속 걷는 길에서는 조그만 물집도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알았다. 한번에 오래 걷지 못하고 중간중간 멈춰서 신발을 벗고 통풍도 시켜주며 걷기를 지속했다. 

 

물집이 고통스럽긴 했지만 길을 걸으며 보이는 풍경이 그래도 위안이 됐다. 여기저기 방목되고 있는 양떼들과 함께 말도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다들 한가롭게 풀을 뜯다가 눈이라도 마주치면 스윽 쳐다보며 저마다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들판의 창고도 눈에 띄었다. 이곳을 지나는 순례자들을 환영하는 의미로 그려놓은 듯한 그림이 있었는데, 놀라웠던 것은 그림과 함께 쓰여있는 글씨 중에 한글이 있는 것이 아닌가! 외국에서는 이런 한글만 봐도 반갑게 느껴진다. 

 

 

오늘 길은 유독 숲길이 많았다. 숲을 걷다가 평지가 나오는가 싶으면 또다른 숲길이 다시 등장했다. 한낮의 더위를 막아주는 데는 숲만한 곳이 없었기에 비교적 더위 걱정 없이 걸을 수 있었다.

 

 

팜플로나로 가는 길에는 작은 마을들이 많이 있었다. 비슷하게 생겼으면서도 마을마다 특색이 있었다. 순례자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형상 비롯해 집집마다 아기자기한 조형물들이 눈에 띄었다. 무엇보다 자연과 잘 어우러져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걷다가 큰 규모의 마을로 들어서게 됐다. 비교적 큰 건물들과 대형 버스가 다니는 도로까지 깔려있어서 처음에는 여기가 팜플로나인가 싶기도 했다. 팜플로나에 가기 전에 바로 위치한 이 곳에는 다양한 건물들을 볼 수 있었고, 파아란 하늘 아래 하나같이 그림같은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이 마을에서 독특한 광경을 보기도 했다. 잠깐 앉아 쉬고 있는데 건너편에 한 사람이 지나가고 있었다. 순례자의 복장은 아니었으니 마을 사람처럼 보였는데, 뭔가 이상하다싶어 자세히 보니 헬멧같은 것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오토바이 헬멧 같지는 않고 굉장히 특이한 모양의 것을 머리에 쓰고 있었다. 왠지 정체가 궁금해졌다. 언뜻 보면 외계인 같기도 했는데... 그 뒤를 교복을 입은 소녀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렇게 궁금증을 남긴 채 얼마 남지 않은 오늘의 목적지 팜플로나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그림 같이 펼쳐져 있는 강을 보았다. 우거진 나무덤불 사이로 유유히 흐르고 있는 강은 하얀 구름과 파란 하늘을 투명하게 비추고 있었다.

 

 

강을 지나고 나니 드디어 팜플로나로 들어가는 길목이 보이기 시작했다. 성곽을 따라 이어져 있는 길의 끝에 오래되어 보이는 성문이 보였다. 역사가 깊어보이는 돌로 된 성문을 지나니 팜플로나였다.

 

 

 

▶산티아고 순례길 이야기 <8>


스페인에는 여러 개의 주가 있는데, 그 중 나바라 주에 있는 도시이자 주도가 팜플로나(Pamplona)다. 역사적으로 유서가 깊은 이 곳은 현대적인 모습과 조화를 이루며 다양한 문화와 전통이 공존하고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이 곳 팜플로나에서 시작하는 순례자도 많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큰 도시인 만큼 들어오는 교통편이 편리하고 순례길에 필요한 물품들도 쉽게 구할 수 있다. 숙소도 많이 있고 볼거리도 많기 때문에 이곳에서 관광을 즐기다 출발하기도 한다.

 

 

여기저기 높다란 건물들이 줄지어 서서 커다란 도시를 형성하고 있는 팜플로나의 골목에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순례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많았다. 활기가 넘치는 골목 한복판에서 잠시 도시의 공기를 느끼면서 구경을 하다 숙소를 찾아 들어갔다.

 

팜플로나
팜플로나-알베르게
팜플로나 알베르게

 

성당에서 운영하고 있는 이곳 알베르게는 규모가 크고 시설도 괜찮아보였다. 기분 좋게 배정받은 자리로 갔다. 내 위층에는 이미 누군가가 짐을 풀어놓은 흔적이 보였다. 짐을 정리하고 씻고 오니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눈 그녀는 아일랜드에서 온 엘렌이었다. 그러고 보니 모습이 왠지 아일랜드인 같아 보였다. 느낌적인 느낌!

 

오랜만에 본 도시를 얼른 구경하고 싶었다. 숙소를 나오자 커다란 성당이 한켠에 우뚝 솟아 있는 게 보였다. 간결해 보이면서도 웅장한 성당의 모습을 잠시 감상하다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팜플로나-성당
팜플로나 성당

 

높은 건물을 벗어나니 넓은 광장이 나왔다. 광장을 중심으로 많은 건물들이 보였다. 유럽 느낌이 물씬 나는 이곳 건물들을 찬찬히 보며 걷다가 한 가게 앞을 지나게 되었다. 타파스라고 써있는 가게의 문 밖으로 길게 줄이 서 있었다. 맛집인가? 여기서도 줄을 서서 음식을 먹는다는 게 왠지 신기하게 느껴졌다.

 

타파스-가게
팜플로나 타파스 가게

 

여기저기 둘러보다 독특한 상점에 발걸음이 멈췄다. 상점 밖에는 중세 유럽에서나 볼 법한 갑옷을 입은 기사모형이 있었다. 들어오는 사람을 환영하는 것 같기도 하고 가게를 지키고 있는 것 같기도 한 기사 너머로 수많은 칼들이 진열되어 있는게 눈에 들어왔다. 다른 물품들도 있었지만 칼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곳 같았다. 그래서 중세의 기사를 이렇게 세워놓은 것일까. 

 

 

그렇게 구경하다보니 어느새 날은 어두워져 있었고 시간이 많이 흘러있었다. 더보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며 숙소로 돌아왔다.

 

이렇게 순례길에서 마주한 첫 도시 팜플로나를 둘러보는 것으로 이번 일정을 마무리했다. 팜플로나를 처음 봤을 때는 기대와 부푼 마음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도시 특유의 소음과 매연 등이 뒤섞이면서 여길 빨리 빠져나가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마음이 번잡해지는 느낌이랄까. 

 

그래도 무사히 이날 순례길을 마쳤음에 감사한 마음으로 자리에 누웠다. 오늘은 푹 잘 수 있기를 바라며.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