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째 순례길을 걷다 보니 느낌이 비슷한 곳이 많아져서 오늘 걸어온 구간구간이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이번 길을 걸으며 느낄 수 있는 포인트는 분명 있었다.

 

 

간만에 고속도로 옆길을 벗어나 넓은 고원 지역으로 나왔다. 드넓게 펼쳐진 하늘의 모습에 감탄이 연신 흘러나왔다. 주위에 산이 있음에도 사방이 넓게 펼쳐져서 하늘의 모습을 360도로 볼 수 있었다.

 

 

파아란 하늘이 배경이 되어 다양한 구름의 모습과 어우러졌고, 세찬 바람은 구름을 빠르게 이동시키고 있었다. 넓디넓은 하늘을 보고 있자니 내 마음도 따라 펼쳐지는 느낌이었다.

 

 

이번 길에는 오랜만에 오르막다운 오르막도 있었다. 산 후안 데 오르떼가 이전 마을에서부터 산을 넘어가는 코스가 있었는데,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며 다양한 길과 풍경이 연출되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광활하게 펼쳐진 소나무숲이었다. 산 중턱으로 가면서 커다란 소나무들이 군락을 이루어 장관을 이루고 있었는데, 마치 예전 CF속에 나온 소나무숲 같은 느낌이었다. 소나무 사이로 길이 나 있지 않았지만 왠지 그 속을 걸어보고 싶어졌다.

 

 

그리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길을 가로질러 소나무 사이로 들어갔다. 흥이 절로 차올랐다. 예상대로 소나무숲 가운데 들어선 느낌은 너무 좋았다. 빽빽하게 들어찬 소나무들의 울창함과 푸르름은 정말 좋았는데 말로는 충분히 설명할 길이 없네. 직접 보지 않으면 모르는 느낌! 짧은 시간이었지만 리프레쉬되기엔 충분했다.

 

 

소나무숲을 지나 '오아시스'라고 쓰인 장소가 나왔다. 순례자들이 곳곳에서 쉬고 있었고 나도 쉴만한 공간을 찾아 가방을 내려놓고 앉았다. 그런데 거기서 장사하고 있는 아줌마의 차에서 음악이 시끄럽게 흘러나왔다. 그 상태로는 제대로 휴식을 취할 수 없어서 얼른 채비를 하고 떠났다.

 

 

사실 몸이 힘든 상태여서 쉬려고 했던 것이었는데 그렇게 떠나니 얼마 가지 앉아 어깨가 무거워지고 발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갈림길을 지나 잠시 쉬기로 했다. 그런데 불편하게 쪼그려 앉아 있어서인지 다시 걷을 때 발의 통증은 점점 더해갔다.

 

아픈 발을 이끌고 산속을 벗어나니 다시 들판이 펼쳐졌다. 이윽고 산 후안 데 오르떼가 마을에 도착했다. 이곳은 조용하고 작은 마을이었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수도원 하나였다. 몸이 피곤한 상태라 광장쪽으로 들어갈 엄두는 내지 못했다.

 

산-후안-데-오르떼가
산 후안 데 오르떼가

 

수도원에 들어가 한바퀴 둘러보고 마침 푹신해 보이는 소파가 있길래 털썩 주저 앉았다. 밖은 한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있어 시끌벅적했는데, 왠지 다들 가방을 가지고 있는 모습이 다음 마을까지 가려는 기색이었다. 곧 나오는 부르고스로 들어가는 거리를 줄이려고 그러는 것 아닐까 싶었다.

 

 

수도원에서 조용하게 쉬고 있는데 들어오는 브라질 부부를 보았다. 차림새를 보니 여기에 숙소를 잡은 것 같았다. 그들과는 약속한 것도 아닌데 참 잘 만나게 된다. 그래도 이렇게 보면 반갑다.

 

소파에 앉아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니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된 느낌이었다. 그때 알았다. 휴식을 잘 취해줘야 걷는 것도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다음 마을 아헤스까지 가는 길은 표시가 잘 나와 있지 않았다. 처음엔 좀 헷갈렸는데 감을 믿고 가다 보니 길은 하나뿐이었다. 안심이 되니 주위 풍경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눈앞에는 그림 같은 나무와 길이, 옆으로는 멀리 고원지대와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소들이 여기저기 방목되어 있었는데, 그 중 한마리는 깜찍한 눈으로 풀을 잘근잘근 씹어대고 있었다. 그렇게 길을 걸어 목적지 아헤스에 도착했다.

 

 

아헤스
아헤스

 

이번 순례길은 그간의 여정 중 가장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예상보다 길어진 것도 있었지만 발상태가 안좋아지면서 속도가 느려진 영향이 컸다. 그래도 잘 버티며 여기까지 왔는데... 상점이 없었다! 이곳 아헤스는 멀리서 봤을 때 큰 느낌이었는데 막상 들어와보니 운영하는 알베르게도 두 곳 뿐이었고. 무엇보다 상점이 없는 것은 생각지 못했다.

 

아헤스-알베르게
아헤스 알베르게

 

사실 원래 머물려 했던 산 후안 데 오르떼가에는 알베르게가 한 곳밖에 없고, 별 볼 것도 없는 것 같아서 아픈 다리를 이끌고 1시간이나 더 걸어 온 것이었는데... 게다가 샤워할 공간도 좁았고, 식당도 마땅치 않았다. 

 

바에서 또르띠아와 오렌지 주스를 시켰는데, 맛은 나쁘지 않았지만 주스는 양이 너무 적었고 전에 로그로뇨에서 먹었던 또르띠아 세트에 비해 가성비가 많이 떨어졌다. 에휴, 어쩌겠나. 내가 선택해서 여기까지 온 것을. 그래도 바에서 처음으로 음식을 시켜서 먹은 경험은 앞으로 음식을 고르는 데 지침이 되어 준 것은 있었다.

 

 

아헤스에서의 숙박이 그리 만족스럽지는 않았으나 좋은 것도 있었다. 이곳이 두번째 사설 알베르게였는데, 출발과 마감시간이 제한되어 있지 않다는 것. 그래서 공립 알베르게와 다르게 시간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됐다.

 

또다른 하나는 밤하늘의 별을 본 것. 밤에 잠깐 바람쐴 겸 밖으로 나와 하늘을 올려다 봤는데, 별이 하나둘씩 보이더니 나중에는 하늘 전체가 반짝거리는 게 아닌가! 바람이 불때마다 반찍이는 모습이 출렁거리면서. 그렇게 별을 많이 본 건 언제인지 기억도 잘 안났지만 정말로 아름다웠다. 별보려고 계속 목을 뒤로 젖히느라 아프기도 했지만 그래도 별보는 즐거움이 앞섰다.

 

이곳을 떠나면 언제 또 반짝이는 별들을 그렇게 많이 볼 수 있을까. 남은 순례길 동안 밤하늘에 수놓아진 별들을 자주 보고 싶다.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