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소프라의 단층침대에서 잘 잔 덕분인지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출발할 때의 몸 상태는 매우 가뿐했고, 배낭의 짐을 혹시 빠뜨린 게 있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습니다. 역시 몸이 건강해야 걷는 것도 즐겁게 할 수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음 마을까지는 거리가 꽤 있었고, 휴식 주기에 따라 중간에 잘 쉬어주면서 걸었습니다. 이윽고 도착한 마을을 보니 예전 순례길에서도 이 곳에 들렸었던 것이 기억이 났고, 그때는 비가 억수 같이 쏟아져 신발까지 완전히 젖었던 것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비가 오지 않을 때 이 마을을 다시 걷게 되니 기분이 새롭기도 했습니다.

 

아소프라를-출발하고-난-후의-순례길의-모습입니다

 

비가 오지는 않았지만 바람이 계속해서 강하게 불고 있었고, 밖에서 휴식을 취하기보다 실내로 들어가야겠다고 생각을 했는데요. 마을 초입에 바가 있었지만 좀 가다보면 또 있지 않을까 싶어 그곳을 지나쳤는데 다른 바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일단 바람을 피해 한쪽에 배낭을 내려놓고 요기를 하며 휴식을 취했습니다.

 

 

 

평소 같으면 그렇게 휴식을 취해도 괜찮았는데, 날이 춥다 보니 오래 있기가 힘들었고, 바로 출발을 할까 하다가 몸 상태를 살폈을 때 처음에 봤던 바로 가서 몸을 녹이며 쉬는 게 낫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다시 길을 돌아가야 되긴 했지만 바에 들어가 따뜻한 차를 마시며 쉬어주니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둘러 갈 필요가 없는 경우라면 여유를 가지고 이렇게 휴식을 잘 취해주는 게 나중에 길을 걷는 데도 더 도움이 됨을 알 수 있었네요.

 

다시 길을 나서 정오가 막 지날 무렵, 이날의 목적지로 생각한 마을 산토도밍고 데 라 칼사다에 도착을 했습니다. 이 마을이 규모도 있고 알베르게도 넓어서 일찍 숙소를 잡으려고 했습니다. 시간이 일러 오픈 전인 알베르게를 잠시 뒤로 하고 마트에 들리기로 했는데요. 큰 마트들이 일요일도 아닌데 문을 다 닫은 상태였습니다. 알고 보니 이날은 '모든 성인 대축일'로, 카톨릭의 기념일이자 유럽의 공휴일이었고, 그래서 마트들도 문을 닫았던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구글지도가 그 중 문을 연 마트를 알려줬고, 거기도 영업시간이 곧 끝난다는 것을 보고 얼른 가서 필요한 것들을 샀습니다.

 

그렇게 마트를 다녀오니 알베르게 오픈시간이 되어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내 여권을 살펴보던 숙소 관리인이 내 이름을 확인하더니 나보고 숙소에 머물 수 없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이유를 물어보니 전에 개인실에 머물렀을 때 분쟁이 있었던 숙소 호스트가 이쪽에 연락을 해서 내가 여기 숙소를 이용하는 것을 막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이도 없고 화도 나서 그렇게 일을 처리해도 되는 거냐고 얘기했지만 그 관리인은 요지부동이었고, 나 역시 그런 식으로 운영하는 숙소에 머물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었지만 그 숙소는 원래 공립이었다가 사립으로 바뀌었고, 그래서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의 입김의 작용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일을 겪게 된 게 참 황당하긴 했지만 더 이상 신경쓰지 않기로 하고 숙소 관리인에게 유감을 표시하고 난 뒤 그곳을 떠났습니다.

 

숙소에서 그런 일을 겪고 나니 이 마을에 머물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고, 여기서 다른 숙소를 찾느니 차라리 다음 마을로 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며 다시 길을 나섰습니다. 하지만 이때부터 고난의 행군이 시작될 줄은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강한 바람이 사정 없이 불어대기 시작했고, 게다가 역풍이었습니다. 몸이 휘청거릴 정도의 바람이 계속 불다 보니 앞으로 나아가는 게 쉽지가 않았습니다. 거기에 한낮의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면서 걷는 것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그냥 좀 더 가면 되겠지 하고 나온 것이 이런 힘든 상황을 맞이할 줄은 몰랐고, 그렇다고 돌아갈 수도 없었기에 태풍 같은 바람을 뚫고 한참을 그렇게 걸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음 마을까지는 거리도 어느 정도 있기도 했지만 강한 역풍의 영향으로 도착하는 데까지 시간이 한참이나 걸렸고, 도착할 무렵에는 몸과 마음이 다 지친 상태였습니다. 그래도 나타난 마을을 보니 더 이상 바람을 맞으며 걷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안심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도착한 마을은 그라뇽이라는 곳이었습니다. 이곳에 기부제로 운영하는 알베르게가 있다는 것을 알고 한번 묵어보고 싶어서 가게 되었습니다. 이전 마을에서 숙소에 머물지 못하게 되는 수모를 겪고 난 이후라 혹시 여기에서도 그런 일이 발생하면 어쩌나 내심 불안함이 있었지만 숙소에 들어서니 젊은 관리인이 반갑게 맞아주어서 마음이 놓이기도 했습니다.

 

그라뇽의 숙소 관리인은 이곳에서의 일정에 대해 알림판과 번역앱을 이용하여 상세히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뭔가 복잡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참여해야 하는 프로그램도 있어서 편한 느낌은 아니었지만 이런 걸 한번 경험해봐도 괜찮겠다 싶었습니다. 한글로 자세히 일정에 대해 설명을 해 놓은 알림판을 보니 반갑기도 했습니다.

 

그라뇽-기부제-알베르게-있는-한국어-알림판입니다

 

개인 정비의 시간을 보내다 거기 머무는 사람들과 함께 저녁식사 준비를 했습니다. 특별히 어려운 것은 없었고 저녁으로 빵과 샐러드, 파스타에 귤과 요거트까지 먹으면서 풍성하고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교회로 이어지는 통로를 건너갔습니다. 한쪽에 있는 공간에 모두 모여 교회 의식에 참여했고, 마치고는 내부도 구경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식사와 일정을 마치고 나서 씻고 나니 어느덧 소등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이곳은 이층 침대가 아닌 매트가 침대 대용으로 쓰이고 있었고, 그게 오히려 자기에는 더 편했습니다. 알고 보니 잠자기에도 좋은 숙소였던 것이었죠. 밖에는 바람이 강하게 부는 소리가 들렸지만 안은 나름 아늑해서 잠시 그 분위기를 즐기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생각지 못하게 원래 생각했던 목적지를 지나 그라뇽이라는 마을까지 오게 되면서 하루를 마무리 했습니다. 황당한 일을 겪고 강한 바람을 헤치며 힘들게 걷기도 해야 했지만 그 덕분에 새로운 곳에 올 수 있었고, 거기서 맛있는 식사와 다양한 경험도 할 수 있었기에 오히려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낸 이날의 순례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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