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비가 오기도 하면서 도시를 제대로 둘러보지 못한 아쉬움이 있어 로그로뇨에 하루를 더 머물고자 했습니다. 일단 체크아웃을 하고 숙소를 나와 근처 성당으로 향했습니다. 향후 일정을 생각하기 위해 마땅한 장소를 찾다가 성당 가까이에 있는 공원을 발견했습니다. 공원에는 편히 앉을 수 있는 돌로 된 벤치가 있었고, 와이파이 연결도 되서 훌륭한 쉼터가 되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추워지기 시작했고, 그때 예전에 한 순례자로부터 바에서 먹는 생맥주 맛이 좋다는 것이 떠올랐습니다. 공원 근처에는 맥주를 파는 바들이 많이 모여 있었고, 그 중 한 곳을 골라 들어갔습니다. 생맥주 한 잔을 주문하니 약간의 마른 안주도 함께 내주었는데요. 맥주 한 잔을 들이키니 그야말로 꿀맛이었습니다. 시원함까지 더해서 기분도 곧장 좋아젔습니다. 이러한 맛을 여지껏 모르던 게 아쉽게 느껴질 정도였죠.

 

로그로뇨에-있는-바에서-먹은-생맥주입니다

 

순례길에 있는 바에서는 맥주만 하나 시켜 먹어도 눈치볼 필요가 없습니다. 가볍게 술 한 잔 하는 문화가 발달해서 그런지 생맥주 한 잔만 시켜도 간단한 안주와 함께 저렴한 비용으로 맛볼 수 있습니다. 한창 더운 시기에 걷고 나서 잠시 쉴 때 먹는 생맥주 한 잔의 맛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겠죠.

 

 

 

그렇게 맥주 한 잔을 기분 좋게 들이키니 졸리기 시작했습니다. 전날 제대로 못 잔 영향이 술이 한잔 들어가니 나타나는 모양이었습니다. 그렇게 앉은 채로 잠깐 졸았다 깼는데, 짧은 시간이었지만 꿀잠을 잔 느낌이 들었습니다. 로그로뇨에서의 꽤 괜찮은 시간을 이곳에서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깨어나서 생각이 든 게 원래 로그로뇨에서 개인실을 잡으려고 했지만 그것보다는 여기를 떠나 좀 더 가는 게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곳에 더 머물러 있어도 마트 외에 갈만한 곳이 없을 것 같았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오후 시간에 길을 좀 더 걷기로 한 것이었죠.

 

그렇게 로그로뇨를 벗어나 다음 마을로 향했지만 출발이 순탄치는 않았습니다. 처음에 나가는 방향을 잘못 잡아서 1시간 가량 헤매기도 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벌써 힘이 들기 시작해 로그로뇨를 벗어나는 것에 대해 다시 고려를 하기도 했지만 기왕 가기로 했으니 그대로 실행하기로 했습니다.

 

오후 늦은 시간에 이 대도시를 뒤로 하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었고, 그렇게 한참을 홀로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래도 맑은 날씨 속에 좋은 풍경들이 함께 해서 크게 힘든 것은 없었습니다.

 

로그로뇨에서-나바레떼로-가는-길-본-풍경입니다

 

로그로뇨를 떠난 지 3시간 정도 됐을 무렵 무렵 목적지로 생각한 마을 나바레떼에 도착했습니다. 조금씩 어둠이 찾아오고 있었기에 일단 미리 봐둔 숙소부터 찾았고, 그곳에 있는 개인실에 체크인을 했습니다. 사전에 이 마을 숙소 중 개인실이 있는 곳을 찾아 보았고, 작은 규모의 마을에서 좀 더 편안하게 개인실에 머무는 게 더 낫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 선택으로 나중에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이때만 해도 전혀 알 수가 없었지요.

 

우선 마을에 있는 마트에 들러 먹을거리를 사 가지고 와서 식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주변 산책을 나섰는데, 밖은 어느덧 해가 지고 깜깜해졌음에도 마을을 돌아보는 게 기대가 되었습니다. 마을이 상당히 높은 곳에 위치해 있으면서 불빛이 많지 않아 아름다운 야경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예상을 했기 때문이었죠.

 

기대한 대로 마을의 맨 꼭대기 지점을 올라가니 주변 풍경이 한 눈에 내려다 보였고, 그 야경과 고요한 분위기가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고요히 그 시간을 즐기고 있다가 어디선가 마을 주민이 얘기하는 소리와 개짖는 소리가 크게 들리면서 분위기가 깨지긴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이곳에 온 것에 대한 만족감이 높았습니다. 문제는 산책을 마치고 숙소에 들어가 씻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나바레떼에서-밤에-본-성당-모습입니다

 

숙소에 들어와 씻기 위해 샤워실에 들어갔는데, 슬리퍼를 신고 움직이다 그만 확 미끄러지면서 중심을 잃고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머리와 엉덩이가 세게 부딪혀서 매우 고통스러웠고 큰 일이 난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지만 다행히 곧 정신을 차리면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스페인 숙소들의 샤워실은 보통 바닥이 미끄러운 소재로 되어 있어서 슬리퍼를 신고 있다가는 미끄러지기 쉬워 자칫 크게 위험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 이전에도 그렇게 넘어진 적이 있었는데 그걸 까먹고 있다가 이번에 크게 당한 것이었죠.

 

이로 인해 큰 아픔을 겪기는 했지만 이것 뿐이었다면 문제라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다시 몸을 추스리고 샤워를 이어나갔는데 한창 샤워하는 중에 밖에 현관문에서 크게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텀을 두고 여러 번 말입니다. 샤워하는 중에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샤워 중이라고 크게 외치고 곧 샤워를 마치고 나왔습니다. 하지만 샤워를 마치고 기분이 좋은 게 아니라 아까 시끄럽게 계속 노크를 한 것에 대한 화가 나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렇게 노크를 할 사람은 위층에 살고 있는 호스트 측이라 생각을 했고, 그래서 옷을 입고 위층에 살고 있는 호스트 집에 가서 노크를 여기서 했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체크인 때 봤던 나이 먹은 호스트 외에 그의 아들로 보이는 남자도 같이 나온 걸 볼 수 있었는데요. 그 남자가 주로 나서서 얘기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는 내 물음에 대한 답은 하지 않고 내가 샤워를 밤 시간에 오래 한 것을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개인실을 비싼 비용을 주고 얻은 것은 도미토리처럼 소등을 하거나 다른 사람 눈치를 보지 않고 개인적인 시간을 편하게 이용하려고 한 것이었는데 호스트 측에서 그런 얘기를 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에 대해 얘기를 하는 데도 내 말은 제대로 듣지도 않고 늦은 시간에 오래 샤워를 했다는 것만 계속 따지고 들자 점점 화가 나기 시작하면서 맞대응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참을 실랑이를 벌이다 그들은 갑자기 짐을 싸서 나가라고 했습니다. 그때가 밤 12시가 넘은 시간이었고, 그 시간에는 다른 숙소가 문을 연 곳도 없을 텐데 무작정 나가라고 하는 그들의 외침에 황당함과 막막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시간에 어디를 가냐고 말을 했지만 그건 너의 사정이고 우리랑 관계가 없다는 말까지 하면서 막무가내로 내보내려 하더군요.

 

샤워하다 넘어진 것에 더해 찬 공기가 계속 들어오는 샤워실에 있다 보니 몸상태도 좋지 않았지만 완강한 그들의 태도에 속절없이 짐을 싸고 나가려고 하는 찰나, 그때 경찰이 숙소로 들어왔습니다. 어떻게 경찰이 온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상황에서 그들의 모습은 내게 든든하게 느껴졌고, 그들이 묻는 것에 대답하면서 사정을 얘기하니 어떻게 된 일인지 어느 정도 이해하는 눈치였습니다. 내 얘기를 들은 경찰이 호스트 측에 가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그 중 젊은 사람이 펄쩍 뛰는 것을 보고 내가 숙소에 머물 수 있게 얘기를 한 것 같았습니다. 결국 경찰 덕분에 내쫓기지 않고 숙소에 머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경찰들이 숙소에 오게 된 경위는 몰랐지만 그들 덕분에 한밤중에 숙소에서 쫓겨나지 않을 수 있게 되어 경찰에 대해 무척이나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동시에 자기들 입장만 내세워서 나를 쫓아내려 했던 호스트 측에게는 큰 반감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죠.

 

한숨을 돌리고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이 일을 누군가와 얘기하고 싶어졌고, 한국에 있는 지인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연락이 닿아 통화를 하던 도중 갑자기 연락이 끊어져 버렸습니다. 그때 위에서 뭘 뽑는 듯한 소리가 났는데 내가 전화하는 소리를 듣고 위층에 있던 호스트 쪽 사람이 와이파이 연결을 끊어버린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순간 너무 어이가 없어서 화도 나지 않았고, 어떻게 할까 가만히 생각을 하다 피곤함이 급밀려들어 잠자리에 들면서 긴 하루가 마무리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때 일을 떠오르면 마음이 안 좋아지기도 합니다. 당시 상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본다면, 그들은 내가 샤워를 밤 늦은 시간에 오래 해서 다른 순례자들에게 피해를 주었다고 했고, 내가 노크한 것에 대해 항의한 것만 가지고 불만을 품었습니다. 그래서 내 얘기는 들으려 하지 않고 계속 자기들 입장만 내세우다 그렇게 한밤중에 숙소에서 내쫒으려고 한 것으로 요약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샤워를 마치고 올라가 노크한 것에 대해 그들에게 물었을 때 왜 그들이 노크를 했는지에 대해 얘기를 침착하게 설명해 주었다면 나 역시 좀 더 이해하는 마음으로 얘기를 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막무가내로 내가 잘못한 것인양 몰아댔고, 이미 감정이 상한 상태에서 그들이 보인 태도에 기분이 더욱 안 좋아져 좋게 얘기가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말로는 내가 오래 샤워를 하면서 다른 순례자들에게 피해를 줬기 때문에 노크를 계속 했다고 이유를 댔지만 나중에 떠올려본 바로는 당시 숙소 구조가 도미토리를 쓰는 다른 순례자들에게 샤워소리가 직접적으로 크게 들릴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위층에 살고 있는 호스트 측이 내가 오래 샤워를 한 것이 거슬려서 그렇게 핑계를 대며 얘기를 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당시 젊은 사람은 다음날 자기가 일찍 순례길에 나서야 하는데 나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하고 있다고 얘기를 하기도 했는데, 샤워소리에 자신이 불편함을 겪은 것에 대해 그것만 직접적으로 얘기하기 뭐하니까 명분을 만들려고 다른 순례자 얘기도 꺼낸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럴 꺼면 애초에 개인실을 받지 말고 도미토리만 운영을 하여 애초에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할 것이지, 왜 개인실을 따로 운영하면서 샤워하는 걸 가지고 항의하면서 편하게 이용을 못하게 한 것인지 이해하기 힘들었고, 그들이 보인 태도는 더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정말 다른 순례자들에게 피해를 준 게 있다면 실랑이를 하느라 그들이 한동안 큰 소리로 떠들며 소동을 벌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숙소에 머무는 사람에게 호스트 측에서 그런 식으로 행동한 것에 대해서는 지금 생각해도 불쾌함이 느껴지네요.

 

정말 그때 경찰이 숙소에 오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지 아찔하기도 합니다. 이날 밤의 시간은 내게 있어 악마와 천사를 동시에 만난 느낌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다행스럽게 마무리가 됐지만 이 일로 인해 스페인 사람에 대한 안 좋은 인상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숙소 호스트의 만행은 여기서 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곧 나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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