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조선의 문단에 변화의 바람이 거세게 일어난다. 정통으로 인정받던 '고문(古文)'의 스타일과 내용에 반기를 드는 일군의 문인들이 등장한 것이다. 이들은 '소품체(小品體)'라는 새롭고 독특한 문장을 선보임으로써 18세기 문단을 뒤흔들었다.


소품문은 길이가 다소 짧으면서 작가의 개성에 따라 문체의 격식이나 내용이 달라지는 자유로운 형태의 글이다. 격언이나 잠언 같은 형태부터 기문, 서문, 제문, 비지문, 편지글 등 전통적인 산문 양식을 유지하되, 각 양식의 격식과 문장 구사법에 구애받지 않는 수필 형태의 글이라 할 수 있다. 


길이가 짧다고 무조건 소품문이라 부르지는 않는다. 어떤 것에도 갇히지 않고, 고정되지 않으려는 '자유로움', 이 파격이 핵심이다. 이용휴, 이덕무, 박제가 이 세 사람이 그 시대의 대표적 문인들이다. 이들의 글은 짧지만 풍성하고, 파격적이지만 잔잔하고, 강렬하지만 평범하다. 소소한 일상으로부터 이러한 글들이 나왔다. 이 세 사람은 거대한 이념이나 진리에 매달리지 않았다.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의 현실에 발붙이고, 그들의 움직임에 주목했다. 



이용휴는 남인으로 성호 이익의 조카이자 학자 이가환의 아버지다. 숙부나 아들보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소품문의 개척자이자 대가로 문단을 주도했다. 과거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백수 선비로, 전업 문장가로 생을 보냈다. 


이덕무는 서얼의 신분으로 극심한 가난 속에서 살았던 문인이다. 몸이 허약하여 병치레도 많았지만 그의 생을 지탱해 준 것은 책이었다. 자신을 '책만 보는 바보'라 부르며, 책을 읽고 탐구하는 것 이상을 바라지 않았다. 


박제가는 서얼로 이덕무와 평생의 지기였다. 소심한 이덕무와 다르게 거침이 없었고 격렬했다. 서얼의 신분으로 세상에 나설 수 없음을 한탄했으나, 할 말을 거침없이 하는 스타일로 그의 문장도 거침이 없어 시원하게 느껴진다.


이들의 소품문은 우리들에게 잔잔한 깨우침을 준다. 폭발적이지는 않지만 심오하고 끈질기게 생각을 바꾸고 우리의 일상을 바꾸게 하는 힘을 준다. 그래서 이덕무의 말처럼 소품문의 낭송은 양생이 된다. 일상으로부터 나온 이들의 문장 하나하나를 읽다 보면 소소한 깨달음과 더불어 좀 더 나은 생의 의지를 다짐하게 되기도 한다.





많은 소품문 중 와 닿았던 이덕무와 박제가의 글 일부를 소개하며 마무리를 하고자 한다.



"나는 날마다 책을 읽으면서 네 가지 유익한 점을 깨달았다. 

첫째, 굶주렸을 때 책을 읽으면 소리가 훨씬 낭랑하다. 글의 이치와 취지를 음미하다 보면 배고픔을 느끼지 못한다. 둘째, 날씨가 추워질 때 책을 읽으면 기운이 소리를 따라 온몸을 타고 돈다. 그러면 몸이 따뜻해져 추위를 잊을 수 있다. 셋째, 근심과 번뇌가 일어날 때 책을 읽으면 눈은 글자를 꿰뚫고 마음은 이치를 향해 달려간다. 그러면 오만 가지 생각이 그 순간 사라진다. 넷째, 기침이 심할 때 책을 읽으면 기운이 돌면서 막힌 것을 통하게 한다. 그러면 기침 소리가 어느덧 멎는다.

만약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으며, 배고프지도 않고 배부르지도 않으며, 마음도 평화롭고 몸도 편안하며, 게다가 등불이 환하고 창이 밝으며, 책들이 가지런하고 책상이 정결하기까지 하다면 책을 읽지 않을 수 없다. 하물며 뜻이 높고 재주가 뛰어나며 나이가 젊고 활기찬 사람이 책을 읽지 않는다면, 무엇을 하겠는가? 나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은 힘쓰고 힘쓸지어다."

- '낭송은 양생이다', 이덕무



"우리나라에서는 송, 금, 원, 명의 시를 배운 자를 최고로 여기고, 당시를 배운 자를 그 다음으로 두며, 두보를 배운 자를 가장 못하게 여긴다. 왜 그런가? 두보를 배운 자는 두보만 최고로 여기고, 그 나머지는 보지도 않고 무시해 버린다. 그런 까닭에 시 짓는 솜씨가 형편없다. 당시를 배운 자도 다를 게 없지만, 두보의 시를 배운 자보다는 조금 더 낫다. 당시를 배운 자들은 두보 외에 왕유, 맹호연, 위응물, 유종원 등 수십 명의 시인을 가슴 속에 담아 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더 나아지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나아진다. 송, 금, 원, 명의 시를 배운 사람은 그 식견이 당시를 배운 자들보다 더 낫다. 이러하니 여러 종류의 책을 폭넓게 보고 성정의 진실됨을 표현한 사람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이로 보아, 문장의 도는 그 마음을 크게 열고 견문을 넓히는 데 있을 뿐, 어떤 시대의 문장을 배웠나에 달린 것이 아니다."

- '시의 도를 터득하려면', 박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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