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명의 한국사 X파일, 그 일곱 번째 기록은 "한자의 주인은 과연 누구인가 : 문자의 기원을 둘러싼 역사 전쟁" 입니다.



한자의 주인은 과연 누구인가 : 문자의 기원을 둘러싼 역사 전쟁



지금은 대부분의 서적들이 한글로 나오지만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이전 시절만 해도 많은 책에서 한자를 찾아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대학교 교재 중에서도 법 같은 서적의 경우에는 한 때 한자가 한글보다 더 많이 표기되던 때도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나라 글자는 한글로 표기되고 읽혀지지만 그 뜻은 한자를 통해 풀이되는 표음문자입니다그래서 한때 한글전용표시를 하느냐 국한문 혼용체를 쓰느냐에 대한 논란이 생기기도 했었죠. 지금은 한글을 쓰는 게 당연시되고 K-POP 등의 영향으로 외국에서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한글에 대한 위상도 높아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이 한자 문화권이기 때문에 한자를 접하게 되는 것은 불가피한 면이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한자를 떠올릴 때 당연히 중국의 문자라고 알고 있고 그것에 대한 의심을 해본 적도 없을 것입니다. 중국어를 배울 때 당연하게 한자를 공부하게 되니까요. 

그런데 한자의 원래 주인이 중국이 아니라면? 김진명의 한국사 X파일 마지막 기록은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을 추적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1898년 중국 역사상 최대의 발굴단이 현지로 발걸음을 향했습니다. 오랫동안 숱한 수수께끼를 뿌려왔던 허난성 안양현에 위치한 은허의 발굴이 드디어 이루어진 것입니다.

발굴단의 규모는 어마어마했습니다. 베이징대학교를 중심으로 한 중국 유수의 대학에서 선발된 고고학 및 인류학, 역사학 교수들과 연대 측정 전문가들, 서지학자들, 심지어는 인골 감정 전문가들까지 망라된 대규모 발굴단은 세상이 깜짝 놀랄 만한 뉴스를 연일 숨가쁘게 토해냈습니다.

모든 뉴스 중 압권은 3,000년 이상 덮어쓰고 있는 흙을 털어내고 세상에 모습을 보이는 고대의 글자, 바로 갑골문이었습니다. 거북이 등껍질과 소 어깨뼈에 쓰인 수많은 글자에 발굴단은 경악했고 흥분했습니다.

그 중에는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글자도 있고 복잡한 글자도 있었지만, 출토된 글자는 분명 한자였고 그 중 수백 자는 누구나 첫눈에도 쉽게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중국의 고대 문헌상에서만 존재하던 나라 은은 분명 실재했고, 그들이 사용하고 있었던 한자는 이미 5,000자를 넘어서고 있었던 것입니다.

위대한 황하 문명의 실체에 모든 중국인들이 들떠 환호하고 있을 무렵, 정작 은허의 발굴지에서는 한 무리의 전문가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이맛살을 찌푸린 채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습니다.

출토된 수백 수천 개의 해골 더미 옆에서 고심하고 있던 이들은 다름 아닌 인골 전문가들이었습니다. 해골로 본 은허의 주인공들, 즉 은나라를 건국한 사람들은 뜻밖에도 한족이 아닌 동이족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안호상 문교부 장관은 재직 시절 대만에서 중국의 문호 임어당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같이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안 장관은 당시 한글 전용이냐, 한자 병용이냐로 시끄럽던 국내의 상황을 빗대 이와 같은 농담을 던졌습니다.


안호상: "임선생, 당신네 중국인들이 한자를 만들어 우리까지 골치 아파 죽겠습니다."

임어당: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한자는 당신네 한국인들의 조상 동이족이 만든 건데 아직 그것도 모른단 말씀입니까?"


사실 임어당뿐만 아니라 한자의 기원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대개가 한자의 주인공을 한족 아닌 동이족이라 주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근거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은허의 발굴, 즉 고고학에서 찾고 있습니다.

인골 외에도 은허에서 출토된 반월형 동검이나 회색 토기, 그리고 무엇보다 묘제 즉, 사람을 장사지내는 방법은 은나라가 동이족의 문명이라는 사실을 확고히 보여줍니다.

묘를 만드는 방식은 부족마다 고유한 데다 오랫동안 바뀌지 않기 때문에 고고학에서는 묘제를 문명 구분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여기는데, 은이 존재했던 당시 중국에서는 동이족의 석관묘와 한족의 목관묘가 대표적인 장묘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은허에서 출토된 묘는 죄다 석관묘였으니 중국의 고고학자들은 앞을 다투어 은나라를 동이족이 건국한 나라로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중국의 학계로서는 차마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이라 은허 발굴 이후 깊은 침묵과 고뇌가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양심적 학자들이 자신의 소신에 따라 연속으로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동이족이 동북쪽에서 내려와 기원전 1,500년 무렵 은나라를 건국하여 약 500년간 살다 주나라에 의해 멸망하자 자신들의 고향인 동북쪽으로 되돌아갔다는 동이의 은나라 건국설은 지금 와서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은의 주인이 동이족이라는 사실은 현대의 고고학적 발굴 이전에도 드물지 않게 기록에 의해 주장되고 있었는데, 사마천 또한 그의 저작 <사기>에서
 

'은나라는 동이족(東夷族)의 나라이고 주나라는 화족(華族)의 나라이다. 또한 동이는 대륙의 동쪽에, 화하는 서쪽에 있다'


라고 기록하며 한족의 주나라가 먼 거리를 이동해 동이족의 은나라를 멸망시켰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인의 조상으로 일컬어지는 동이족은 어떤 뿌리를 가진 사람들일까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최초로 문명을 이룬 인류 중 일부가 서쪽으로 이동해 이집트 문명을 이루었고, 차츰 동쪽으로 이동한 사람들이 인더스, 갠지스 문명을 이루고 다시 조금 동쪽으로 이동해 황하 문명을 이루었다고 보는 것이 4대 문명론입니다.

그러나 이 4대 문명론은 최근에 와 거센 도전을 받고 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최근에 뚜렷이 드러난 '요하 문명' 때문입니다. 요하 문명의 주인공은 황하 문명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아니라 인류의 이동 초기에 메소포타미아에서 직접 이동해왔고 그 시기도 황하 문명보다 빨랐다고 하는 것이 요하 문명의 핵심입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동이족은 거의 모두 한족에 흡수되어 버렸고 우리 한국인들은 동이의 현존하는 후예로서 과거의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밝혀야 할 책임이 있다고 작가는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동이족이 한자를 발명했음에도 지금에 와서 한자는 당연히 한족의 글자로 여겨지게 되었을까요? 아니 그 이전에 동이족의 나라 은은 왜 한족의 나라로 수천 년 동안 여겨져 왔을까요?

여기에는 심대한 역사 왜곡이 있었습니다. 그 왜곡의 중심에는 놀랍게도 성인이라 불리는 공자(孔子)가 있습니다. 사실 일본의 식민사관보다 무서운 게 중국의 춘추사관인데, 세상을 오로지 한족 중심으로만 보는 춘추사관을 확립한 사람이 바로 공자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동이족의 은나라를 한족의 주나라와 같은 뿌리로 합쳐버린 공자가 본래는 은나라 유민의 후예라는 점입니다. 공자가 은나라를 한족이 아닌 동이족의 나라로 보고 있었는지 여부는 분명치 않지만 절규와도 같은 그의 두 마디 고백을 생각해보면 은나라와 주나라 사이에서 그가 겪었던 정체성의 고뇌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나는 본래 은나라 사람이다"


공자가 말년에 한 말로, 그가 은나라의 동이족과 주나라의 한족을 같은 민족으로 여겼다면 나오기 힘든 고백입니다. 또한 그는 젊은 시절 주나라 수도 낙양을 가보고는 감동하여 이렇게 결심합니다.


"나는 주나라를 따르련다"


이 역시 은나라 유민으로서 살 것이냐 아니면 현실을 따를 것이냐의 고뇌를 담은 한마디 절규입니다.

방황 끝에 마음을 정한 공자는 이전까지 아무도 손대지 않은 고대사를 자의적으로 편집해 <서경>, <춘추> 등의 역사서를 남겼습니다.

그의 역사관은 사건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데 치중하기보다는 확고부동한 자신의 시각에 따라 사건을 배열하거나 만들어내기까지 한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왕조의 흥망과 관련해서 심한 왜곡이 보이는데, 이것은 그의 중심사상인 충(忠)이 갖는 현실적 모순 때문입니다.

백성은 군주에게 충성해야 하는데 만약 군주가 자질이 엉망이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그는 매우 고심했습니다. 신하든 백성이든 군주에게 충성해야 할 사람들이 그 군주의 자질을 판단한다면 충이란 사상은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그는 오랜 고심 끝에 유학이라는 현실적 학문에 신(神), 즉 하늘을 접목시켰습니다.

신하와 백성은 군주의 자질이 엉망일 경우에도 충성해야 하며, 정말로 형편없는 군주는 하늘이 천명을 내어 교체한다는 이론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이 이론에 따라 그는 망하는 나라의 임금은 반드시 엄청난 학정을 펴는 폭군이고, 폭군을 축출하는 사람은 천명을 받은 성군이라는 공식을 만들어 자신이 편찬한 사서에 넣었습니다.

이 공식에 따라 하나라의 마지막 왕 걸은 요부에 빠진 폭군이 되었고, 은나라의 마지막 왕 주 역시 악녀에 미혹돼 주지육림의 학정을 편 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물론 하나라를 멸망시킨 탕과 은나라를 멸망시킨 주나라 무왕이 성군으로 기록이 되었고요.

또한 공자에게 한족의 나라 주보다 이민족의 나라 은이 500년이나 앞서 건국되었다는 사실은 또 하나의 문젯거리였습니다. 나라의 창건을 하늘의 뜻으로 본 공자는 국가의 권위와 정당성을 '오래된 것'에서 찾았는데, 대륙에 최초로 만들어진 나라의 주인공이 동이족이라는 사실과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결국 은나라와 주나라를 같은 종족으로 합치는 길을 택해 동이족의 나라 은나라는 주나라와 혈통이 같은 나라, 즉 한족의 나라로 둔갑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공자가 편찬한 <서경>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화하만맥 망솔불비(華夏蠻貊 罔不率俾)

'주나라 문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키니 한족 동이족 할 것 없이 따르지 않은 이가 없었다'


비유하면 '왜가 조선을 치니 왜인, 조선인 할 것 없이 모두 기뻐하며 따랐다'는 것과 같으니, 왜곡의 정점을 찍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공자의 제자들은 스승을 존경하면서도 스승의 역사 기록은 믿지 않았으며, 자공은 '은나라 주왕이 그리 폭군은 아니었던 듯하다'는 표현으로 스승을 거역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맹자는 '<서경>을 믿느니 차라리 없음만 못하다' 라는 직설적 표현으로 공자의 왜곡을 비판하며 반대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춘추사관에 의해 역사 왜곡을 당할 수밖에 없는 절대적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기록한 우리 자체의 역사서를 모조리 상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대사는 말할 것도 없고 비교적 후기인 고구려를 기록한 종이 한 장, 대나무 한 조각, 우피지나 양피지 한 편조차 이 땅에 남아 있는 게 없습니다.

실상이 이러해 모든 기록을 한족 중심 사관으로 도배된 중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니 우리의 온전한 옛날 모습을 알아낸다는 무척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작가는 우리 역사의 진짜 문제점이 과거의 기록을 상실했다는 사실에 못지않게 이 사회의 역사의식 부재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선 500년간 이웃 나라인 중국을 하늘로 보는 춘추사관, 이어진 일본의 지배와 식민사관, 그 후 군사독재를 겪으며 우리는 성숙한 문화적 내면적 의식을 크게 상실하고 현실적 가치에만 눈이 먼 채 인간을 너무나 왜소하게 보도록 길들여져 있습니다.

작가는 사람들이 "돈이 최고"라던지 "돈 없으면 죽는다" 등으로 표면적 현실에만 눈을 뜨고 있다 보니 보이지 않은 것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문화와 역사는 눈앞의 물질보다 오히려 삶을 훨씬 가치 있게 하고 자신감을 북돋울 뿐만 아니라 사물을 정확하고 본질적으로 볼 수 있도록 하는 힘인데 말입니다. 

지구인 모두가 신뢰하는 '과학'의 눈으로 은나라를 보고 은자를 볼 것이냐, 공자의 제자들조차 부정하는 '춘추'의 눈으로 주나라를 보고 한자를 볼 것이냐는 우리가 지금 이 순간부터라도 길들여진 의식을 벗어나 자각과 이성의 눈으로 역사를 보고 현실을 보느냐에 달려 있다고 강조하며 작가는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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