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명의 한국사 X파일, 그 여섯 번째 기록은 "태조 이성계는 어떻게 죽었을까 : 함흥차사의 숨은 사연" 입니다.



태조 이성계는 어떻게 죽었을까 : 함흥차사의 숨은 사연



함흥차사는 조선 시대에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 사이에 있었던 유명한 고사입니다. 아들인 이방원이 아버지인 이성계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함흥으로 사신을 보냈지만 가는 사람들마다 이성계가 활로 쏘아 죽여 누구도 되돌아오지 못했다는 이야기로 많이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이야기가 진실이 아니라면? 작가는 우연한 기회에 이에 대한 진실을 파헤치게 되었습니다. 그럼 함흥차사의 진실에 대해 이제부터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나라에 IMF가 닥쳐 사람들의 삶이 도탄에 빠졌을 때 작가는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힘을 주는 한편 곧 닥칠 증권시장 개방에 따른 국제 핫 머니의 위험을 알리고 대비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은 소설을 쓰려 했습니다. 


당시 작가는 산에 기거하면서 그러한 경제소설은 대중이 소화하기 어려울 것 같아 어떤 방법으로 소설을 쉽게 풀어쓸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지내면서 산에서 밤을 새며 생각에 빠지기도 했는데, 깊은 생각을 하다 보니 현재의 어려운 나라 사정을 걱정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역사를 관통해온 나라의 운명 같은 것을 더듬어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작가의 머리에 우리나라의 지도자들은 모두 끝이 안좋았다는 생각이 스쳐갔고, 그러다 보니 나라의 힘이 모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선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왕이든 대통령이든 끝까지 잘된 지도자를 찾아보기가 정말 어려웠습니다. 곰곰이 그 이유를 생각해보던 작가는 왕권이나 정권을 둘러싼 나쁜 전통이 우리 역사 속에 흐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작가는 부인을 흉탄에 잃고 자신 역시 변사한 박정희 대통령부터 시작해 일인들에게 불태워진 명성황후, 뒤주 속에서 갇혀 죽은 사도세자와 삼촌에게 죽은 어린 단종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는 기도를 시작했는데, 유독 한 사람에 이르러서는 마음이 편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바로 태조 이성계였습니다. 작가는 왜 그런지 알 수가 없어 석연치는 않았지만 의구심을 품은 채 영혼을 달래는 기도를 계속했습니다. 그럼에도 좀처럼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고, 밤이 깊도록 그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불현듯 뇌리를 스쳐가는 한마디 있었는데, 그것이 함흥차사였습니다. 그 순간 작가는 이성계의 한(恨)을 훔쳐본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하루 온종일 함흥차사에 얽힌 비의를 생각하다가 그는 짐을 꾸려 돌아와 <조선왕조실록>을 확인했습니다. 비록 왕조실록은 그런 사실을 숨기고 있었지만 생각했던 대로 이성계는 매우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그의 최후는 함흥차사라는 이야기로 500년 이상 덮여왔고, 따라서 그의 한은 너무나 오랫동안 풀리지 못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작가는 마침내 그로부터 구성의 영감을 받고 소설을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늘이여 땅이여>라는 소설 속 주인공의 입을 통해 함흥차사의 비밀을 세상에 공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다음은 <하늘이여 땅에서>에 나오는 함흥차사와 관련된 대화입니다.




A: 함흥차사란 무엇인가요? 이태조가 자신을 찾아오는 사신들을 죽인다는 것인데, 그 궁극적인 뜻은 결국 함흥에 가면 죽는다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과연 누가 죽일까요? 이태조가 죽일까요?


B: 명궁인 이태조가 활을 쏘아 죽인다는 것 아니오?


A: 그렇지 않습니다. 아들한테 붙잡혀 함흥에 유폐당한 이태조가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활로 쏘아 죽인다고요? 사신이든 다른 이든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과 친구와 부하들이 찾아오는 데 그들을 죽인단 말입니까? 오히려 사람이 그리웠을 이태조가 눈물을 흘리며 반가워했어야 할 사람들을 죽인다니 말이 안 되는 것이지요.


B: 그 정확한 뜻은 이방원이 보내는 사신만을 죽인다는 것 아니오?


A: 왕이 자신의 부친이자 태상왕인 이태조에게 보내는 사신이라면 미관말직의 관리였을 리 없습니다. 조정의 원로이거나 적어도 당상관의 벼슬은 하고 있었겠지요. 그런데 실록에 혹은 어느 역사 기록에 이태조에게 사신으로 가서 죽었다는 관리들의 이름이 있던가요?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게다가 이태조에게 보내는 사신 중에는 이성계의 친구이거나 부하이거나 따르던 사람도 많았겠지요. 그들을 모두 죽였을까요? 아니면 이야기를 나눠보고 사신의 목적으로 왔다고 하면 가는 길에 활을 쏘았을까요?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에요. 함흥차사는 말로만 존재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가서 돌아오지 않은 사신은 없는 것이 그 증거죠.


B: 그렇다면 어째서 함흥차사란 얘기가 생겨났다는 거요?


A: 사람들이 함흥에 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볼 수 밖에 없어요. 즉, 이태조를 찾아가려는 사람들에게 대한 경고란 말이지요.


B: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흥에 가는 사람은?


A: 죽었지요.


B: 이태조가 아닌 이방원에게 죽었다는 이야기요?


A: 바로 그렇습니다. 그게 함흥차사에 숨어 있는 뜻입니다.


B: 그럼 이방원이 태조를 음해했다는 것인데, 조선 500년간, 아니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리들은 그 함흥차사란 말에 속아왔다는 말이오?


A: 그렇지요. 이방원의 쿠데타 이후 태조는 죽을 때까지 한 순간도 마음 편히 살 수 없었을 겁니다.




누군가는 이 가설이 지나친 비약이 아니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후부터 당대를 다루는 여러 역사드라마에서 이러한 작가의 주장에 맞게 태조와 태종의 관계가 설정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사실 <태조실록>은 이방원의 심복 하륜이 이미 손을 댄 데다가 세종 8년에 그 쿠데타 부분을 다시 한번 고쳐 썼기에 당시의 정확한 사실을 담고 있다고 보기 힘든 구석이 있었던 것입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니까요.


함흥차사란 말을 보면 유폐의 냄새가 짙게 납니다. 그 비의는 이성계가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는 것인데, 이것은 유폐의 전형인 셈입니다. 


당시 유교 사회는 충과 효가 으뜸의 가치였는데, 이방원은 자신이 아버지를 함흥에 유폐시킨 채 사람들과의 접촉을 차단하고 있다는 사실에 큰 부담을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유롭게 그를 찾게 내려버두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었고, 그래서 퍼뜨린 소문이 바로 함흥차사였을 것으로 작가는 보고 있습니다. 


함흥차사는 권력이 어떻게 진실을 막고 역사를 왜곡하는가를 보여주는 아주 적나라한 사례입니다. 현대에도 수없이 일어나고 있는 왜곡 보도 속에서 진실의 실체에 어떻게 다가갈 것인지를 시사해주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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