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명의 한국사 X파일, 그 네번째 기록은 "대통령의 죽음, 배후는 누구인가 : 박정희 죽음의 진실" 입니다.



대통령의 죽음, 배후는 누구인가 : 박정희 죽음의 진실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이었던 박정희는 암살당했습니다. 당시는 내부적으로 유신체제와 긴급조치 등으로 영구집권을 꾀하는 정권에 대항하여 민주화 요구가 거세게 일고 있던 때였습니다. 더불어 외부적으로는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이 한국에서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겠다는 발표를 했습니다. 


내외부적으로 박정희 정권의 위기를 불러오고 있었지만 무엇보다 주한미군 철수는 당시의 남북의 군사력에 비추어볼 때 한반도에 전쟁을 불러올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에 박정희를 더욱 곤혹스럽게 했습니다.


결국 박정희는 주한미군 철수를 철회해달라는 거듭된 요청에도 지미 카터가 뜻을 굽히지 앉자 '핵 카드'를 빼어 듭니다. 북의 침략을 저지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핵무기 뿐이니, 우리가 그것을 개발하겠다고 카터에게 타협을 시도했던 것입니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반란은 그즈음에 발생합니다.


당시 중앙정보부가 박정희 체제 유지의 핵심 역할을 하고 있었음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의 막강한 권력의 수장은 언제나 대통령의 심복 중의 심복이면서 모든 걸 바쳐서 대통령에게 충성할 수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만이 오를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자리의 수장이 대통령을 배신하고 총을 쏘았던 것입니다.


이 사건에 대한 당시 합동수사본부의 발표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안가의 소연회에서 당시 자리를 함께 했던 경호실장 차지철로부터 모욕적인 발언을 듣고 순간적으로 격분해 벌인 우발적 사건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합수부의 그러한 발표를 곧이곧대로 믿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사건 당일, 김재규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경호실장 차지철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습니다. 그날은 삽교천 방조제가 완공된 날이라서 대통령이 참석해 테이프 커팅을 한 후 헬리콥터를 타고 귀경하던 중이었습니다. 


대통령은 평소 궁정동의 안가에서 술을 마셨는데, 그 안가를 중앙정보부에서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소연회를 준비하라는 차지철의 전화를 받은 김재규는 의전과장 박선호에게 연회 준비를 지시합니다. 그리고 나서 김재규는 매우 이상한 전화 한 통을 겁니다. 육군참모총장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입니다.


궁정동 안가에는 건물이 여러 동 있는데, 김재규는 그 중 한 동에 연회를 준비시키면서 동시에 다른 옆 동에 정승화 총장을 초대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다시 중앙정보부 제2차장보 김정섭에게 전화를 걸어 육군참모총장과 저녁 약속이 있었는데 갑자기 각하의 소연회 연락이 와서 자리하기 어렵게 되었으니 대신 나가달라고 얘기합니다. 완전히 거꾸로 얘기를 한 것입니다.


국가에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모든 힘이 육군참모총장에게 가게 되어 있습니다. 육군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이 되기 때문입니다. 김재규의 이렇듯 준비된 행동을 미루어볼 때 합수부의 '우발적 범행'이란 발표는 앞뒤가 맞지 않았습니다. 


여기까지는 이미 알려진 일이었고, 작가는 그렇다면 김재규가 과연 언제부터 이 거사를 준비했던 것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김재규가 왜 박정희를 죽이려 했는지 알기 위해서는 김재규라는 사람이 당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어떤 사람들과 접촉하고 있었는지를 살피는 게 중요했습니다. 


박정희는 김재규를 심복 중의 심복이라 생각해 중앙정보부장에 임명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김재규는 박정희와 180도 다른 생각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김재규는 '박정희의 핵 개발은 미친 짓이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는 이미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요청에 의해 박정희의 뒷조사를 해서 보고를 한 적이 있을 만큼 은밀하게 미국과 가까이 지내고 있었습니다. 박정희가 핵개발로 미국과 타협을 하려던 즈음, 마침 CIA 국장인 터너가 김재규를 미국으로 초청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박정희는 당연히 주한미군 철수를 철회하는 데 CIA가 힘써달라는 부탁을 하라고 김재규에게 지시했습니다. 


어떤 밀담이 오갔는 지는 알 수 없지만 김재규가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워싱턴 정가에서는 남북한 군사력을 비교한 문서가 나돌기 시작했습니다. 북한이 남한에 비해서 무력이 월등히 유리하기 때문에 당장 주한미군을 철수하면 남한이 먹히고 말 것이라는 내용의 보고서가 <워싱턴포스트>에 특종으로 실리고 미국의 정가가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김재규과 관련된 또 다른 인물로 스티브라는 자가 있었습니다. 주한미군 중위로 한국에 부임한 CIA 요원 스티브는 미국에서 유창한 한국어 교육을 받았습니다. 김재규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터너는 김재규의 영어가 너무 서툴고 속내를 나누려면 영어를 해야한다는 명목으로 스티브를 영어 교사로 소개해 주었습니다.


스티브는 김재규에게 영어를 가르치면서 수시로 미국 주요 인사들의 생각을 김재규에게 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가뜩이나 미국의 추종하는 김재규를 스티브는 더욱더 세뇌시키고 조종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김재규는 미국을 믿었고 미국이 자신의 뒤를 받치고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사건 이후 합수부의 심문을 받을 때 "내 뒤에는 미국이 있다!"고 절규했던 것입니다. 


핵에 대한 이견 외에 김재규가 대통령을 쏜 이유는 당시 사회 상황에 대해서도 박정희와 완전히 다른 인식을 가졌던 것도 있었다고 합니다. 


김재규는 부마사태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그 반정부 시위는 정부가 선전하는 좌익이나 일부 불순 노동자, 학생만이 아니고 일반 시만과 중산층이 가담한 그야말로 엄청난 규모의 항쟁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이후 그는 '이대로는 큰일난다, 박정희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증거가 김재규가 자신의 심복이자 중앙정보부 감찰실장으로 있던 김학호와 함께 수없이 준비했던 도상연습이었습니다.


김재규는 박정희와 차지철을 죽이고 나서 육군참모총장 정승화와 같은 차를 타고 현장을 떠납니다. 당연히 자신의 부하들이 기다리고 있을 중앙정보부가 있는 남산으로 가야 하는데, 그는 중앙정보부 100미터 앞에서 차를 꺾어 용산에 있는 육군본부 벙커로 갑니다. 여기서 그간 박정희를 제거한 후의 계획을 철저하게 짜둔 그가 갑자기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김재규가 그 중차대한 시점에서 중정이 아닌 육본 벙커를 택한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작가는 백방으로 알아보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고, 마침내 중요한 정보를 하나 알게 됩니다. 그것은 김재규의 영어 가정교사 스티브가 문제의 10월 26일 밤 오산 미군 비행장에서 도쿄로 날아가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그와 더불어 작가는 정말 이 사태의 키를 쥐고 있는 인물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 인물은 당시 주한미군 정보공작 총책임자였던 존 천(John chun)이었습니다. 


그는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다 CIA에 포섭되어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CIA 본부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가 첫 부임지인 도쿄 태평양사령부에서 근무하던 중 한국에서 5·16 군사 쿠데타가 발발했습니다. 그때 존 천에게 떨어진 임무가 한국으로 들어가 쿠데타 주동자인 박정희에 대해 알아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박정희는 외부에서 볼 때 베일에 싸인 인물이었고, 남로당 당원 출신이라는 이력도 있었기 때문이었죠.


그렇게 해서 존 천은 한국으로 가서 박정희를 만나게 됩니다. 이후 그의 증언에 따르면, 그때 박정희는 눈물까지 보이면서 그냥 두면 내 조국 대한민국이 정말 비참한 상태로 전락하기 때문에 오로지 나라를 제대로 키워보고 싶은 애국힘 하나로 봉기한 것이라고 호소했다고 합니다. 


그에 감동한 존 천은 보고서에 박정희가 좌익이 아니고 반공주의자면서 나라를 걱정하는 훌륭한 군인으로, 우국충정의 일념으로 이번 사태를 벌였다고 적었습니다. 결국 미국은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를 용인했고, 자신이 박정희의 은인 중의 은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후 존 천은 아예 한국으로 배속되어 주한미군의 첩보공작 부서에 있게 됩니다. 물론 뿌리는 여전히 CIA였지만, 그는 차츰 승진을 해서 주한미군 정보공작 총책임자가 됩니다 


문제는 이렇게 특별한 사람이 어쩐 일인지 10월 26일 사건 발생 3일 후인 10월 29일에 전격적으로 전역을 해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 특이한 것은 그가 10월 26일을 사이에 두고 전날 입원을 하고 다음 날 퇴원을 했는데 그 병명도 단순한 감기였습니다.


작가는 이 사람을 만나봐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갖은 노력 끝에 겨우 접근을 할 수 있었고, 일단 그의 마음을 열기 위해 쌀 수입업자로 위장해 만나게 되었습니다. 여러 번의 만남 끝에 깊은 얘기를 할 수 있을 만큼 가까운 사이가 되었고, 마침내 그로부터 10·26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존 천은 자신의 손으로 살린 박정희를 좋아했고 그래서 박정희를 보호하고 도우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전역을 하게 된 이유를 묻자 '하우스먼' 얘기를 꺼냈습니다. 하우스먼은 주한미군의 터줏대감으로 한국 정계에서 굉장히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10월 25일, 감기기운으로 안 좋아보이는 존 천을 보고 하우스먼은 빨리 치료를 받아야 한다며 거듭 권해 부대 내에 있는 병원으로 가게 합니다. 단지 주사를 한 대 맞았을 뿐인데, 존 천은 깊은 잠에 빠져들게 되었고 일어났을 때는 10월 27일 오전이었습니다. 


지난밤 대통령 피살로 부대가 뒤숭숭한 것을 알게 된 존 천은 하우스먼에게 찾아가 따졌고 하우스먼은 그에게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존 천은 곧바로 전역원을 내고 미국으로 돌아가버렸던 것입니다.


존 천의 증언에 따르면, 둘 사이에는 밀약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우스먼은 만약 꼭 그래야만 한다면 최후의 조치를 취하기 전에 존 천에게 알려주기로 했고, 그러면 존 천이 청와대에 들어가 대통령과 담판을 지을 기회를 가지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우스먼은 그 약속을 저버리고 존 천을 잠들게 한 후 일을 벌였던 것입니다.


여기까지 듣고 작가는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김학호와 존 천 두 사람이 자신들도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털어놓은 이야기를 종합했을 때 마침내 10·26의 배후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자료와 증언, 정황 증거로 판단해볼 때 , 머리가 누구였던 미국이라는 거대한 존재가 김재규로 하여금 육본 벙커로 가도록 지시를 했거나 유도를 했고, 연락책이 바로 스티브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중에 김재규의 쿠데타는 실패하고, 그간 박정희에 의해 비밀리에 축적되던 모든 핵 개발 기술이 사라져버렸습니다.


결국 핵 개발을 끝까지 강행하려 했던 박정희와 그걸 막으려 했던 미국과의 충돌. 이것이 바로 10·26 당일의 미스터리를 추적한 작가의 결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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