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명의 한국사 X파일, 그 세번째 기록은 "그날 경복궁에는 무슨 일이 있었나 : 명성황후 최후의 순간" 입니다.




그날 경복궁에는 무슨 일이 있었나 : 명성황후 최후의 순간



명성황후는 조선시대 고종의 부인이자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의 어머니이기도 한 인물입니다.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와 이름이 비슷해 자칫 헷갈릴 수도 있으니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명성황후는 일본인들에게 살해당한 조선의 마지막 국모로 유명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를 소재로 드라마나 뮤지컬로도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유명세와는 별개로 그녀에 대한 평가는 엇갈려서 명성황후보다 민비라고 부르는 게 맞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명성황후의 최후에 대해서는 일본 자객들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자세한 전말은 밝혀진 게 없었는데, 이에 대한 단서를 작가는 한 책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일본인 작가 쓰노다 후사코는 어느 것 하나라도 의심이 들면 글을 쓰지 않는 철두철미한 작가로 유명한 데, 그녀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나의 임무는 일본인에게 역사를 반성할 기초자료를 제공해주는 것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한국을 50번 이상 오가며 쓴 책이 <민비 암살>입니다. 


작가는 이 책을 읽다가 다음과 같은 구절에 주목하게 됩니다.



"더욱이 민비의 유해 곁에 있던 일본인들이 같은 일본인인 나로서는 차마 묘사하기 괴로운 행위를 하였다는 보고가 있다."



이 구절에 나오는 '괴로운 행위'에 대해 쓰노다 후사코가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지만, 작가는 그 부분을 읽고 뭔가가 있다는 느낌을 직감적으로 하게 됩니다. 


명성황후의 최후는 베일에 가려져 있었습니다. 사건 당시 경북궁에 있던 러시아인 기사 사바친과 궁중수비대 대장이었던 미국인 다이 장군의 증언이 있었지만, 둘다 일본인들에 의해 현장에서 떨어진 곳에 감금된 상태여서 직접적으로 문제의 현장을 보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작가는 <민비 암살>을 번역한 교수를 통해 쓰노다 후사코에게 그 구절의 의미와 출처를 물었고, 그녀로부터 사간(死姦)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출처에 대해서는 선뜻 밝히지 않았지만 작가가 계속 압박한 결과 여러 권의 책제목과 자료들을 열거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그 책들과 자료들로부터 그 이상의 정보를 얻지는 못했고, 그 후로도 계속해서 쓰노다 후사코에게 물어봤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습니다. 어쨌든 그녀가 민비의 최후에 대한 내용을 어딘가에서 보고 썼을 테니, 작가는 그 출처를 찾기 위해 그 방면의 책들을 섭렵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일본 사학자 야마베 겐타로가 쓴 <일한병합소사>라는 책을 만나게 됩니다. 거기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1895년 10월 7일 밤부터 다음날 이른 아침에 걸쳐서, 대원군이 훈련대에게 호위되어 있는 동안 일본 수비대와 대륙 낭인의 무리가 칼을 빼들고 경복궁으로 밀고 들어가서 민비를 참살하고, 그 시체를 능욕한 뒤에 석유를 뿌려 불을 질러버린 것이다."



쓰노다 후사코가 '사간'이라고 표현했던 것이 여기서는 '사후 능욕'이라고 서술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은 결국 같은 말이었고, 그 구절에 달린 주석을 확인해보니 "일본의 국립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 장 <헌정사편찬회문서> 이토 백작 문고"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작가는 즉각 일본의 대학에서 일본 외교사를 전공하며 자신을 돕던 한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는 그길로 작가가 그토록 애타게 찾았던 원전의 사본을 팩스로 보내게 됩니다. 이것은 '에조 보고서'라 이름이 붙은 문건이었습니다.


에조 보고서는 당시 조선 정부 내부 고문관이었던 이시즈카 에조가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실행자 '미우라 공사' 몰래 자신의 직속상관인 일본 정부 법제국 가네즈미 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입니다. 여기에는 '민비 사건'의 발단부터 명분, 모의자, 실행자, 외국 사신, 영향 등이 일본 고어로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 보고서의 첫 문장이 '미우라 공사에게는 배신의 극치이지만' 으로 시작되는데, 이는 곧 사건을 은폐하려는 미우라 공사 몰래 보낸다는 뜻이며 따라서 어떠한 조작도 가해지지 않았다는 방증이기도 한 셈입니다.

 


"낭인들은 깊이 안으로 들어가 왕비를 끌어내 칼로 두세군데 상처를 입히고 발가벗겨 국부검사를 했습니다. 우스우면서도 분노가 치밉니다. 마지막으로 기름을 부어 소실했는데 이 광경이 너무 참혹하여 차마 쓸 수가 없습니다. 궁내대신 또한 몹시 참혹한 방법으로 살해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원전의 내용을 보자 작가는 앞서 이 내용을 서술한 두 일본인의 해석이 잘못됐다는 것을 한눈에 알았습니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가 아니라 살아 있을 때 행해진 끔찍한 만행이었던 것입니다.


국부검사라는 한 단어에서 그 실태가 어떠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데, 과거의 역사를 한스러워하는 쓰노다나 진보적 역사학자인 야마베조차 이 끔찍한 만행을 그대로 옮길 수는 없어 '사후'라는 해석을 붙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만큼 이 사건은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만행이었던 것입니다.


이 전대미문의 사건에 대해 외국의 정부와 사절들이 거세게 항의하자 일본은 미우라 공사 이하 경복궁에 난입한 39명 전원에 체포해 히로시마 형무소에 가두고 재판을 열었습니다. 그 재판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격이었고, 살해범들은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작가는 이 사건을 우리나라 검찰에서 기소하고 우리나라 법정에서 다시 재판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법리적으로 불가하다 넘길 일이 아니라 이러한 진상을 일본인들에게 제대로 알려 온갖 논리로 호도되고 있는 '조선 진출'의 본질을 직시하도록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이를 주제로 <황태자비 납치사건>이라는 책을 썼고, 무엇보다 일본인들에게 이 책을 읽히고 싶었습니다. 일본인 중에도 이런 사실을 알기만 하면 누구보다 앞서 반성하고 사죄할 줄 아는 사람들이 다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일본에서의 출판을 추진했지만 번역까지 마쳐진 상태에서 우익세력의 협박으로 결국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이후 이 소설이 NHK 몇몇 PD들의 어려운 결정에 의해 한국어 교재로 쓰이다 하타 쓰토무 전 총리의 강력한 질타를 받고 내려졌다는 소식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듯 한일 간의 올바른 역사를 저들에게 알리는 일이 결코 쉽지 않지만 우리는 중단 없이 추진해야 한다는 말로 작가는 마무리를 짓습니다. 후쇼샤의 엉터리 역사교과서를 거부한 것도 선량한 일본 시민들이었음을 언급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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