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명의 한국사 X파일, 그 두번째 기록은 "임나일본부 조작의 역사를 파헤친다! : 광개토태왕비의 사라진 세 글자" 입니다.




 임나일본부 조작의 역사를 파헤친다! : 광개토태왕비의 사라진 세 글자



광개토태왕비에 대해서 자세한 내용까지는 모르더라도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그 이름을 들어봤을 것입니다. 호태왕비(好太王碑)라고도 불리는 광개토대왕비는 서기 414년에 장수왕이 아버지 광개토태왕의 업적을 기리며 세운 비입니다. 높이 6.39m의 광개토태왕비는 한국 비석 중 최대 크기로, 고구려 문화의 웅장함을 나타내주는 유물이기도 합니다.


 

광개토태왕비는 수백 년 세월을 압록강 건너편 중국의 지안 땅 속에 묻혀 있다가 큰 비가 내리면서 흙이 대거 쓸려 내려간 후 돌연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보통 비에 비해 워낙 크고 표면이 무척 거칠어서 탁본뜨기가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비의 탁본은 베이징에서도 희귀품으로 거래가 되었다고 합니다.


일본이 제국주의를 앞세워 조선을 침략하고 그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때, 비의 탁본이 그 무렵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일본 헌병 중위 사코 가게노부에 의해 일본 본토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가 가져온 탁본은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고, 그들은 곧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을 조작해 내게 됩니다. 


그럼 여기서 잠시 '임나일본부'에 대해 짚고 가보겠습니다. 일본에는 7세기 경에 편찬된 <일본서기>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그 책 속에 과거 일본이 '임나'라는 나라를 지배했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들은 바로 이 '임나'를 광개토태왕비의 신묘년 기사에 끼워 맞춘 것입니다. 


문제가 되는 신묘년 기사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

(이왜이신묘년래도해파백잔○○○라이위신민)



동그라미 표시된 세 글자는 비에서 지워졌는데, 세 글자 중 마지막 자에서 근(斤)이 보이기 때문에 신(新)자로 해석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百殘○○新羅



그렇게 놓고 보면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이 됩니다.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 百殘○○新羅以爲臣民

(이왜이신묘년래도해파 백잔○○신라이위신민)



일본의 학자들은 보이지 않는 이 두 글자를 임의로 '임나'를 끼워 넣고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백제와 신라는 옛날부터 고구려의 속민이라 조공을 바쳐왔다.)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임나, 신라를 쳐부수고 신민으로 삼았다. (그래서 호태왕은 즉위 6년째인 병신년에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토벌했다.)'


보이지 않은 두 글자를 어떻게 임나라고 써넣을 생각을 생각을 했는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지만, 실제로 그들은 '임나'라고 써넣고는 자국민들에게 교육을 해왔던 것입니다. 


과거 진위를 의심받는 역사책 속에나 존재했던 나라 임나는 한반도 안에서 백제, 신라와 같이 어우려져 있었고 일본은 이곳 임나에 '일본부'라는 관청을 두어 관리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임나일본부'설입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한국의 학자들이 확실하게 반대 의견을 내놓지 못했던 것은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무엇인가를 격파했다는 저 구절의 한자 해석이 문법이나 문장구조상 매우 자연스러워 보였기 때문입니다('왜'가 주어가 되면 '파'의 목적어는 백제, ○○, 신라가 되기 때문).


한국의 사학자들이 별다른 대응을 못하고 일본은 전후에도 교과서를 통해 임나일본부설을 전국민에게 교육을 하고 있었는데, 1972년 재일 사학자인 이진희 씨가 놀라운 발표를 합니다. 이른바 '석회도말론'인데, 일본이 광개토태왕비에 석회를 발라서 조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일본의 억지 주장에 대해 제대로 대응 한번 못하고 있던 한국의 사학자들은 이 발표에 환호성을 터뜨리며 반겼습니다. 그 후 한국에서는 이에 대한 논문들이 쏟아졌는데, 유명하다는 사학자의 대부분이 여기에 동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작가는 이 석회도말론이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진희 씨는 여러 장의 탁본을 비교하여 래도해(來渡海)의 세 글자가 탁본마다 조금씩 다르니 일본인들이 석회를 발라 조작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석회는 물에 잘 녹습니다. 백년 전 석회를 발라 조작을 한 것이 비가 많이 오는 곳에서 아직도 건재하다는 주장을 믿기가 어려웠던 것이었죠.


한중 수교가 되어 중국으로 가는 길이 열리자 작가는 바로 지안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직접 광개토태왕비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작가가 그곳에 갔을 때는 일본이 글자를 조작했다고 주장하는 때로부터 이미 백여 년 세월이 흐른 뒤였음에도 '래도해(來渡海)'라는 세 글자는 선명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그즈음에도 한국에서는 '석회도말론'을 바탕으로 논문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고 있었는데, 이런 주장은 오히려 일본의 역사 왜곡을 도와주고 있는 꼴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일본으로서는 한국 측 주장대로 석회를 발라 조작한 적이 없으니 조작 사실이 없다는 얘기만으로도 손쉽게 역사 왜곡의 본질을 호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비 앞에서 진실을 찾겠다고 결심을 한 뒤 한국으로 돌아왔고, 비와 관련된 남한, 북한, 일본, 중국의 자료와 서책들을 모두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광개토태왕비의 중국 측 권위자인 왕건군의 저서가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왕건군은 자신의 책 말미에 참고자료들을 마이크로 필름 형태로 싣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 속에 광개토태왕비의 저본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저본은 어떤 변화가 있기 전에 맨 처음 보이는 그대로를 기록한 것을 말하는데, 흔히 초본 혹은 초록이라고도 합니다. 왕건군의 책 부록에 기적처럼 이러한 저본이 붙어 있었고, 그 속에는 안 보이는 글자 중 첫 자가 동녘 동(東)자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저본은 어떻게 남게 되었을까요? 저본은 초균덕에 의해 기록되었는데, 그는 별명이 초대비라 불릴 정도로 광개토태왕비를 끼고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오랜 세월 땅속에 묻혀 있다 세상에 나온 광개토태왕비가 짙은 이끼에 덮여 탁본을 뜨기 힘들자 비에 말똥을 발라서 태워버렸고, 이 탓에 비는 표면이 갈라지고 오랜 세월에 걸쳐 유실된 글자들에 더하여 추가로 여러 글자가 없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그는 비를 태우기 전에 그때까지 보였던 글자들을 종이에다가 한 자 한 자 또렷이 옮겨 적어 두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저본을 그는 죽기 전 자신의 조카딸에게 맡겼고, 이것이 50년 이상 그녀의 다락방에 두터운 먼지를 쓴 채 방치되었다가 초균덕의 가계를 추적했던 왕건군에 의해 발견되어 마침내 그의 저서에 실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안 보이는 두 글자 중 첫 글자에 동(東)을 넣으면 비의 해석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 百殘東○新羅以爲臣民

(이왜이신묘년래도해파 백잔동○신라이위신민)



'일본이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 백제와 임나, 신라를 쳐부수고 신민으로 삼았다'는 일본측의 해석이 '임나'자리에 '동'이 들어감으로써 설 자리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동'을 넣으면 주어는 자연히 백제가 되어버리고, 동(東) 다음에는 정(征), 벌(伐), 침(侵) 등의 동사가 옵니다. 즉 '백제가 동으로 신라를 쳐서 신민으로 삼았다'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 뒤에 나오는 구절 '그래서 병신 6년에 대왕(광개토태왕)은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토벌했다'와 꼭 맞아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동(東)하나만으로도 일본의 임나일본부 조작이 드러난 셈이었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그 사실을 섣불리 발설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소설가로 막 알려진 작가로서, 사라진 글자 중 하나가 동(東)자라고 주장한들 그러한 주장을 일본은커녕 우리 역사학계조차 주목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작가는 이러한 주장을 한국과 일본 학계에 동시에 알릴 생각으로 <몽유도원(원명 '가즈오의 나라')>이라는 소설을 썼고, 마침내 '동(東)'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석회도말론'을 주장하던 논문들은 그 주장의 근거를 잃고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소설이 나온 후 작가는 일본의 광개토태왕비 연구 일인자를 찾아갔습니다. 그때 그는 도쿄대학교의 동양사 학장을 맡고 있었는데, 그 귀한 탁본을 다섯 장이나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보란 듯이 탁본들을 바닥에 깔며 도대체 비를 조작한 흔적이 어디에 있냐고 작가를 다그쳤습니다. 작가는 그의 말에 동의하며 품 속에서 저본을 꺼내 보였습니다. 


저본의 존재에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저본의 글자들과 탁본의 글자 1,775자를 한 자 빠짐없이 조심스럽게 비교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본의 신뢰성을 완전히 확인하고 난 후 그는 쉴 새 없이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동(東)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고 합니다. 


온 인생을 바쳐 광개토태왕비를 연구해온 그에게 이 동(東)의 출현이 크나큰 충격으로 자리잡았음을 확인한 작가는 그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물었습니다.



"학자란 진실 앞에 목숨을 거는 존재가 아닙니까. 일본 최고의 지성인 도쿄대학교의 학장으로서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진실은 무엇입니까?"



한마디 말도 없이 떨리는 손으로 연거푸 담배를 피워대던 그에게서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회한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사실 그 자리에 임나를 집어넣는 건 맞지 않습니다. 나는 고등학교 교과서를 집필하고 있는데 내년부터 내 책에서 임나일본부를 빼고 다른 저자들에게도 권고하겠습니다."



이렇게 이 사람을 필두로 이후 일본의 모든 교과서에서 임나일본부가 완전히 빠졌으니 이 허구는 생성부터 폐기까지 꼬박 130년이 걸린 셈입니다. 


임나일본부와 같은 역사 조작은 단순히 학문의 영역에 머무르는 게 아닙니다. 역사 조작이 무서운 것은 이것이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결국은 침략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당시 군국 일본은 광개토태왕비를 악용해 임나일본부라는 말을 만들어 자기 땅을 되찾는다는 명분을 내세웠고, 이에 따라 많은 일본인들이 우리나라를 침탈하면서도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역사 조작의 위험성을 느끼게 됩니다.


임나일본부 같은 역사 조작에 맞서 진실을 밝히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작가에게 감사의 마음이 절로 납니다. 더불어 지금도 어디선가 벌어지고 있을 지 모르는 역사 조작에 대항하기 위해 역사의 진실을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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