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산티아고순례길 잼유이칸
사하군에서 하루 쉬고 순례길을 나서니 그 자체로 기분이 경쾌해졌다. 컨디션이 좋아진 것도 있겠지만 역시 순례길은 걸을 때 가장 기분이 좋고 마음도 편해진다. 배낭의 무게는 여전히 묵직하게 느껴지지만 내가 싸온 배낭의 무게를 짊어지고 길을 걸을 때 가장 본질에 충실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번 길은 도로를 옆에 두고 나란히 걷는 구간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길의 형태는 동일하면서 주위의 풍경만 변했다. 비록 차도가 옆에 있었지만 차들이 주로 다니는 메인도로는 아니어서 신경이 많이 쓰이진 않았다. 때때로 빠른 속도로 휙 지나갈 땐 놀라기도 했지만 주위 풍경을 충분히 즐기는 걸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첫 마을에 들어설 즈음 두 갈림길을 보여주는 표지판이 나왔다. 일단 마을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어떤 외국여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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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길에 들어와 20일 만에 휴식을 갖게 됐다. 전에 이라체 포도주 사건도 그렇고 이번 휴식도 그렇고 한번쯤 일정이 계획과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모두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일정이었다. 길을 걷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었다. 이처럼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는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생긴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여기서는 길을 걷고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반복해서 하는 것 외에 다른 것에 신경쓸 게 거의 없어서 그때그때 느끼는 감정을 잘 들여다볼 수 있다. 저녁때는 한국인들이 모여서 음식을 해먹고 왁자지껄 떠드는 것을 보았는데 나도 모르게 외로워지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고 그들은 각자 자기들의 방식대로 하고 있는 것일 뿐인데 왜 그랬을까? 외국인들이 아닌 같은 한국인들끼리 알아들을 수 있는..
까리온에서 오늘 도착한 사하군까지는 40킬로가 넘는 거리였다. 처음부터 사하군으로 갈 생각은 아니었다. 일정표에는 레디고스까지 나와 있었고, 일단은 거기까지 생각을 하고 출발한 길이었다. 이번 일정은 초반에 중간 마을이 없어 긴 거리를 가야 했기에 먹을 것 등을 미리 준비했는데, 그러다보니 배낭무게가 평소보다 무거워진 상태였다. 그래도 가면서 먹다 보면 조금씩 가벼워질테니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까리온을 벗어나는 길에 전날 봤던 강을 건너게 됐다. 어제 오후 햇살에 비칠 때와 느낌이 달랐기에 미리 와서 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리를 지나니 성당 같이 보이는 큰 건물이 있었고, 맞은편에는 쉼터가 있었다. 건물의 자태도 좋았거니와 그 옆이 숲으로 이루어져 있어 잠시 배낭을 벗어두고 구경을 했다. 주변..
이번 여정의 날씨도 맑음맑음! 숙소에서 빨리 나가라는 눈치가 없어서 여유롭게 출발을 했다. 마을에서 나갈 때 잠시 헤매다 방향을 제대로 잡았다. 마을을 막 벗어나려는 순간 등 뒤에서 붉은 기운이 확 느껴졌다. 돌아보니 태양이 형체를 점점 온전히 갖추면서 떠오르고 있는 것이었다. 잠시 그 광경을 지켜보다 오늘의 순례길을 시작했다. 도로 옆의 길을 나란히 걷다 문득 지금 걷고 있는 내 모습을 찍고 싶어졌다. 마침 옆을 지나가는 순례자 아저씨에게 사진찍는 걸 요청했고, 그는 흔쾌히 뒤에서 내가 걸어가고 있는 연출샷(!)을 찍어줬다. 예전부터 한번 찍어보고 싶었는데 드디어 이렇게 찍게 된 것. 찍은 것을 건네받고 그와 나란히 걷다가 얘기를 나누게 됐다. 그는 프랑스에서 온 필립이었고 나이는 55세. 휴가기간 동..
아침부터 날씨가 무척이나 좋은 날이었다. 구름도 거의 없었고 그래서인지 금방 더워져 뜨거운 한낮의 태양을 온몸으로 생생히 느끼며 걷게 되었다. 17일차. 이제 까미노의 중반부로 접어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기본적인 생활리듬이 익숙해졌고 드디어 발에 밴드를 붙이지 않고도 걷게 된 첫 날이기도 했다. 아직 완전하진 않아도 발가락의 통증은 거의 사라져 걸을 맛이 난다고 할까. 이때쯤 오니 발이 길에 익숙해졌을 것이고, 신발도 길이 들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 그래도 방심은 금물! 끝낼때까지 끝난게 아니다. 까스뜨로헤리스를 떠나 고원 위로 올랐을 때 뒤를 돌아보았다. 마을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고, 넓게 펼쳐진 주변 풍경은 말 그대로 절경이었다. 이후부터는 사방이 들판과 언덕의 연속이었다. 절로 사색을 하게..
오전 8시에 시작한 순례길의 하늘은 아직 어스푸름했다. 곧 해가 뜨려는 듯 보였고 마을을 막 벗어날때 쯤 뒤를 돌아보니 멀리서 조금씩 붉은 기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와 반대로 앞쪽에는 안개가 짙게 끼어 눈앞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뿌했다. 이런 안개를 본 적이 언제였던가... 안개 속에서 걷다보니 어렸을 적 안개가 뿌옇게 낀 논밭을 걸었던 기억이 났다. 신비롭고 설레었던 느낌이 다시 피어오른다. 그렇게 걷다 문득 뒤를 보았다. 해가 안개 속에서 점점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몹시 인상적인 풍경에 홀린 듯 바라보다 마침 같은 숙소에서 머물렀던 순례자 아저씨를 만나서 그에게 사진 한장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사진을 찍은 그는 한번 보라고 했고 난 풍경을 담은 것만으로도 기꺼워 대충보고 집어 넣었다. 나..
부르고스를 바로 떠나기엔 조금 아쉬움이 있었다. 도시의 규모가 커서 짧은 시간 안에 다 둘러보지는 못하지만 산타 마리아 성당은 가기 전에 한번 더 보고 싶었다. 마침 일요일이라 성당 예배도 보고 가기로 했다. 아침햇살에 비친 성당의 모습은 어제 볼때처럼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그 모습을 담고자 사진을 찍고 있는데 갑자기 누가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누구지 하고 봤는데 매그너스라고 본인을 밝히자 그제서야 알아봤다. 전에 같이 순례길을 걸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고 이번엔 안경을 써서 생소했던 것. 어쨌든 다시 봐서 무척 반가웠다. 매그너스는 부르고스가 순례길의 종착지라고 했다. 이후엔 빌바오로 넘어간다고 하더라.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는 얘기를 끝으로 그와 작별인사를 나눴다. 반갑게 헤..
오늘 순례길에서는 저번 로그로뇨에 이어 또다른 대도시를 볼 수 있다. 그곳의 이름은 부르고스. 아헤스에서 부르고스까지 가는 길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중간에 산을 올라가면서 큰 돌들이 박혀 있는 땅을 만나긴 했지만 그 외엔 무난하게 갈 수 있었다. 아침부터 날씨가 흐려지더니 알베르게를 나서자마자 바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에 한두방울 내리길래 배낭커버만 씌우고 나섰는데 곧 비가 몸이 젖을 정도로 내리기 시작하여 다시 알베르게로 돌아와 우의까지 장착한 후 길을 나서야 했다. 비를 맞으며 출발한 두번째 여정. 비 자체의 양은 많지 않았으나 바람이 강하게 불어 시야를 가렸다. 비가 오면 날이 흐려져 주변 풍경이 희미해진다. 특히 바람이 거세지면 앞만 보고 가기가 쉬워져 목적지향적인 걷기가 되버리기 십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