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여유 있는 아침을 보냈다. 알베르게가 사설이라 일찌감치 나가지 않아도 됐다. 일찍부터 준비하고 나가려는 사람들 때문에 분주한 느낌은 났지만 그들이 일찍 나가고 나니 조용해져서 좀 더 편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같은 방을 썼던 외국인 순례자 중 한 아줌마가 날 보고 반가워하길래 왜 그러지 싶었는데, 알고 보니 론세스바에스에서 출발할 때 내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던 사람이었다! 당시 누군가를 찍어준 건 기억나는데 그게 누구인지는 알 리가 있나. 그래도 그 얘기를 들으니 나 역시 무척이나 반가웠다. 그렇게 짧은 재회를 하고 그녀는 무리와 함께 먼저 떠났다. 

 

 

가볍게 아침을 챙겨 먹고 나서 숙소를 나섰다. 어제 동네를 둘러보지 못해서 다는 못보더라도 주요 포인트는 보고 가기로 했다. 밝을 때 본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는 꽤나 큰 마을이었다.

 

비야프랑카-델-비에르소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

 

이곳은 옛 성과 커다란 성당들 그리고 인상적인 박물관도 있는 유적지 세트장 같은 마을이었다.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높은 데서 보니 마을이 한 눈에 들어왔다. 마치 중세 시대 마을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 그 중 박물관이 특히나 눈에 띄었는데, 전면 부분 양쪽에 뿔처럼 생긴 조각이 있었는데, 의도한 건지 부서져서 그런 건지는 확실치 않지만 지금까지 봐왔던 양식과 달라 인상 깊게 다가왔다.

 

 

그렇게 쭉 살펴보다보니 1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가방을 맨 상태로 마을을 오르락내리락 다니다보니 벌써부터 힘이 들긴 했지만 마을 구경을 할 수 있던 건 좋았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본격적으로 순례길에 올랐다.

 

 

이번 길의 특징은 도로를 계속 탄다는 것. 아무 보호장치 없는 도로 옆을 걷기도 하면서 조심스럽기도 했지만 아스팔트 위를 계속 걸었기에 걷기에는 편한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적막하기도 했다.

 

 

 

아침부터 비가 가늘게 내리다 비바람이 거세게 불기도 하면서 우의를 입었다 벗었다 하며 한참을 걸었다. 주변에 같이 걷는 순례자도 없어 비를 맞으며 도로를 걸을 때 느껴지는 외로움과 고독함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다가왔다. 어머니 생각도 나고 지인들 생각도 어느 때보다 떠올랐다. 

 

그렇게 도로를 타다가 첫 마을에 도착했다. 그런데 마을은 인기척 하나 없이 조용했다. 알베르게도 닫혀 있는 듯했다. 다시 길을 나서 도착한 마을은 좀 독특했다. 마을 표지판은 일찌감치 나왔는데, 들어가도 들어가도 마을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잘못 들어왔나 싶기도 했는데, 한참을 더 들어가고 나서야 마을의 모습이 나타났다.

 

 

시간이 꽤 흘러 배가 고팠기에 여기서 잠시 쉬며 요기를 하기로 했다. 바에 들어가 토스트를 한번 시켜봤는데, 빵 두쪽에 딸기쨈과 버터를 줘서 처음엔 실망스러웠다. 그런데 막상 발라 먹어보니 맛있었다. 이렇게 음식에 대한 만족도가 높았던 적은 처음이라 느낄 정도로. 

 

그렇게 잘 먹고 나와 길을 나섰는데, 여기서부터 길이 헷갈렸다. 까미노 표시가 보이지 않았지만 마을을 통과해서 나가는 걸로 안내서에 나와 있어 일단 쭉 걸었다. 그러다가 갈래길을 만났고 여기부터는 차도로 진입하는 느낌이었는데, 역시나 표시는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불안해졌고 괜히 모르고 갔다가 헤매느니 일단 마을로 돌아가 다시 살펴보는게 낫겠다 싶어서 발길을 돌렸다. 한참을 걸려 돌아온 마을에서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봤지만 그들도 확실하게 알고 있는 느낌은 아니었다. 자꾸 마을에서 시간이 지체되자 초조해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계속 나아가야 했기에 이번엔 내 느낌대로 가기로 했다. 

 

한참을 가도 표시는 보이지 않았다. 다시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계속 걷다가 길이 만나는 지점에서 드디어 까미노 표시를 발견했다. 왠지 허탈한 느낌도 있었지만 감사한 마음으로 표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길은 곧 도로로 연결되었는데, 이때부터 비가 거세지기 시작했다. 우의를 재빨리 착용하고 걷는데, 우중충한 날씨 속에 홀로 도로를 걷고 있으니 마음도 어두워지는 느낌이었다. 또다시 강하게 느껴지는 외로움과 고독감. 처음에는 밀어내고 싶었으나 곧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고 마음을 먹었다. 이런 감정도 내가 가지고 있는 소중한 감정이고, 혼자가기로 선택했기에 발생하기 쉬운 감정이었기에 내가 감당할 몫이라고 생각하며. 

 

그렇게 받아들이며 즐겨보려 하니 더이상 우울한 느낌은 생기지 않았다. 사실 그런 상황에서 걷는 게 흔한 일은 아니고, 걸으면서 그런 감정을 겪어보는 것도 특별한 것일 수 있기에 값진 경험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걷다 생각보다 일찍 다음 마을에 도착해서 이런 즐김이 오래가진 않아 살짝 아쉽기도 했다.

 

 

두어개의 마을을 통과하고 나자 오늘의 목적지 베가 델 발까르세에 도착했다. 막바지에 지났던 마을들 사이의 간격이 짧아 갑자기 온 것 같은 느낌. 오후 3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에 도착해서 여유 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겠다 싶었다.

 

숙소를 살펴보다 마을 중간 위치에 있는 공립 알베르게를 발견했다. 들어가보니 관리인은 없었고, 전날 봤던 사람이 이미 머물고 있는 것을 보고 그에게 정보를 얻었다. 전체적인 느낌이 괜찮았고, 세탁기와 건조기를 갖추고 있는 것을 봤을 때 여기서 묵기를 결정했다. 

 

베가-델-발까르세-알베르게
베가 델 발까르세 알베르게

 

사실 오늘 숙소를 일찍 잡은 건 침낭을 빨리 세탁, 건조해서 베드버그를 박멸시키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었다. 요사이 밤마다 베드버그 증세로 인해 고생을 하고 있었는데, 베드버그의 온상이라 여겨지는 침낭을 한시라도 빨리 세척하고 싶었다.

 

관리인이 들어오자 그에게 세탁을 하기 위해 잔돈을 바꿔달라고 했는데 없다고 했다. 그래서 근처 상점에 들러 물건을 사고 잔돈을 받았는데, 세탁과 건조를 둘 다 하기엔 코인이 부족한 게 아닌가. 사실 물건도 잔돈 바꾸려고 산 건데... 그래서 이번엔 다른 상점에서 초콜릿을 평소보다 비싸게 주고 사서 잔돈을 얻었다. 

 

그렇게 잔돈을 확보하고 돌아왔는데 또다른 문제 발생. 세탁기과 건조기 사용법을 잘 몰랐던 것이다. 마침 관리인도 또 사라져 버리고. 그때서야 내가 침낭 세탁을 하는 데 꽂혀 서두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역시 서둘러서 잘 되는 게 없고, 서두른다고 일이 빨리 진행되는 것도 아니었다.

 

다른 할 것부터 해 나가다가 침낭세척법을 인터넷에서 살펴봤는데, 베드버그로 인한 침낭 세척을 위해서는 세탁은 별 소용없고 건조를 시켜야된다고 나와 있었다. 그래서 건조기 사용법만 알아보고 바로 침낭을 건조기에 넣고 돌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잔돈이 많이 필요하지도 않았고, 굳이 필요 없는 물건을 사지 않아도 되는 거였는데 마음이 조급하다보니 이렇게 됐다. 이것도 좋은 배움이겠지.

 

그렇게 침낭을 넣어두고 마을을 돌아보기 위해 숙소를 나섰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이곳도 규모가 어느 정도 되는 마을이었다. 독특한 건물들과 조각들도 여기저기 있었다. 안내서에는 이 곳이 순례자들에게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나와 있었는데, 그것을 직접 느껴보지는 못해 궁금증만 남기도 했다.

 

 

숙소로 돌아와 건조시킨 침낭을 기분 좋게 꺼냈다. 방에 들어가보니 전에 길에서 봤던 한국인 아줌마를 봤고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빨래와 샤워를 하고 마트에 가서 조리식품을 사와 맥주와 함께 저녁으로 먹었다. 그러면서 아까 인사를 나눈 아줌마 일행과 얘기를 나누다가 졸음이 찾아왔다. 내일 일정만 간단히 살펴보다 침대에 몸을 맡겼다.

 

오늘은 비교적 목적지에 일찍 들어왔지만 조급한 마음에 여유 있게 시간을 보내지는 못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내 마음을 잘 살피면서 차근차근 일을 처리해나가는 지혜가 필요함을 느낄 수 있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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