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다음날 새벽 5시 반. 이미 5시 전에 깨서 밖으로 나와 있었다. 알람이 울리기 전에 깼는데, 손등이 자꾸 가려워서 그랬던 것 같다. 잠결에 긁고 있는데, 문득 거기는 가려웠던 적이 없는 곳이라는 걸 알았다. 갑자기 잠이 달아났고, 일어나서 보니 오른손 등에 모기 물린 것처럼 두 곳이 크게 부풀어올라 있었다. 그런데 왠지 모기는 아니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베드버그?!

 

 

아, 나는 안 물릴줄 알았는데 정녕 이렇게 물린 것인가... 이미 이삼일 전부터 발등부터해서 손등의 노출된 부분에 빨간 반점처럼 보이는 것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엔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계속 더 생기는 느낌이 들었고, 간지럽기도 한 것을 보면 아무래도 내가 방심을 한 것 같다. 증상이 나타났을 때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으니... 이곳 알베르게는 깨끗해보였기 때문에 여기서 새롭게 물린 것이라고 생각이 들진 않는다. 

 

의심이 가는 건 일단 침낭. 분명 최근 머물렀던 곳에서 물린 것 같고, 베드버그가 침낭에 옮겨 붙어와 계속 존재하다가 밤에 잘 때 주로 노출된 부위로 와서 무는 것 같다. 정확한 원인을 파악하긴 어렵지만 의심가는 것부터 처방을 해야겠지. 그리고 최근 몸이 힘들 때가 많았는데, 면역력이 떨어지면서 이렇게 된 게 아닌가 싶다. 사하군 들어서면서부터 그 후 몇 번 무리했다 싶었고, 딱 이 무렵에 베드버그 증세도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일단 해결책은 이렇다. 물린 데는 갖고 있는 맨소래담이나 베드버그약을 사서 바르고, 침낭은 다음 숙소에서 세탁과 건조를 시킨다. 배낭에는 전체적으로 베드버그 퇴치제를 뿌린다. 그리고 당분간은 긴 시간 걷지 않으면서 무리하는 일이 없도록 일정을 조절한다. 산티아고가 가까워지면서 사실 일정을 단축하여 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는데, 좀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가야겠다. 급할 것도 없는데 괜히 무리하다 더 큰 문제가 생기면 곤란하니까. 

 

아직 남은 일정은 길다. 천천히 즐기면서 그리고 무리하지 않게 일정을 소화하도록 하자. 베드버그에 물린 건 안타깝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잘 조치하고 앞으로 예방을 잘 하는 게 더 중요하다.

 

 

오늘의 여정은 비가 내리는 듯 안 내리는 듯 하는 날씨 속에서 진행됐다. 목적지에 도착할 무렵 비바람이 갑자기 불어와 잠깐을 지나가는 데도 힘이 꽤 빠졌다. 

 

중간에 신경질적으로 걷는 여자 순례자를 봤는데, 뭔가 사람들을 적대시하는 느낌이었다. 거기에 신경쓰다가 원래 가려고 했던 길로 못 가고 아스팔트 길로 빠지기도 했다. 그래서 미련이 많이 남았다. 길 때문에 미련이 생긴 건 이번이 두번째. 현재에 깨어있지 못해서 그런 것임을 알았기에 다시 이런 상황을 만들지 말자고 다짐을 했다.

 

 

도중에 포도나무 흙길로 올라가 멋진 경관을 볼 수 있었다. 구름이 뭉게뭉게 조각처럼 입체감을 띠고 있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이 때 사진을 너무 많이 찍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썼는데, 눈으로 충분히 즐기고 꼭 찍을 것만 찍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그게 생각만큼 잘 안되지만). 

 

 

포도밭을 벗어나 길로 들어서면서 한참동안 이 길이 맞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별다른 표시도 없고 차가 쌩쌩 다니는 도로 옆길이 이어졌는데, 나중에 쉼터와 함께 표시를 발견하고 안심을 했다. 몸이 힘들면 마음도 금방 불안해지는 것 같다. 그래서 오후의 여정은 몸상태에 따라 잘 조절할 필요를 느낀다.

 

 

그때부터 날이 흐려지기 시작했는데, 흐린 하늘 아래 보이는 포도나무는 왠지 구슬퍼보였다. 확실히 햇빛의 유무에 따라 풍경의 느낌이 많아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참을 더 걷고서야 오늘의 목적지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에 도착했다. 이곳은 '스페인 민박'이란 프로그램에서 차승원과 유해진, 배정남이 함께 알베르게를 운영하며 순례자들에게 숙소와 음식을 제공해줬던 곳이기도 하다.

 

비야프랑카-델-비에르소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

 

일단 숙소부터 잡고 난 후 샤워실을 들어가 보았을 때 마음은 참담했다. 한쪽에는 찬물만이 나왔고, 다른 쪽 시설은 내가 그렇게 싫어하는 원버튼 샤워기가 떡 하니 있었다. 원래 가려던 숙소가 닫혀있다고 하여 이곳으로 온 건데, 미리 시설을 확인해보지 못한 내 불찰이었다. 가뜩이나 어제 샤워와 빨래도 안한 상태여서 여기 머무는 게 도무지 내키지 않았다. 다행히 환불을 받고 그곳을 나왔지만 다시 어디로 갈지 생각하니 아득해졌다. 

 

다리도 아파오고 주변 지리를 모르니 막막하기만 했지만 역시 이럴 땐 물어보는 게 좋다. 마을 주민으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연속으로 물어보니 레오라는 알베르게가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곳으로 향했다. 

 

그렇게 들어간 알베르게는 일단 느낌부터가 아늑했다. 안에 시설을 둘러보니 깔끔했고 무엇보다 욕실이 마음에 들어 바로 등록을 했다. 이전 알베르게보다 두 배 비싼 가격이었지만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짐정리를 하고 전날 못했던 샤워와 빨래를 마치고 나오니 벌써 날이 어둑해져 있었다. 이젠 해가 떨어지면 추웠기 때문에 어디 돌아볼 생각은 하지 못하고 마트에 가서 간단하게 장을 봐왔다. 

 

여기 숙소에는 순례길에서 몇번 마주쳤던 외국인들이 있었다. 그 중 여러번 마주치며 신경을 쓰이게 했던 사람도 있었는데, 인사를 하고 얘기를 나눠보니 아일랜드에서 온 것을 알게 됐다. 그런데 그가 맨발로 이러저리 다니는 것도 그렇고 다른 외국인이 큰 소리로 떠드는 것을 보았을 때 불쾌감이 올라왔다. 이렇게 신경쓰이는 게 면역력이 떨어져서 그런가 싶은 생각이 잠깐 들기도 했다.

 

저녁식사를 하면서 귤도 같이 먹었는데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거기에 초콜릿까지! 사실 여행하면서 먹는 건 부실한 편이었다. 오늘도 그렇게 영양가 있게 먹은 건 아니었지만 저녁을 이렇게 배부르게 먹은 건 처음이 아닌가 싶다. 그만큼 배가 고팠던 걸 수도 있고. 그렇게 먹고 나니 금방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가만히 돌이켜보니 그동안 알게 모르게 무리를 한 게 있었고, 잠도 편안하게 못 자다보니 면역력도 떨어지고... 그러면서 예민해지기도 하고 베드버그 증상도 나타나게 된 듯 싶다. 특히 최근 일정 중 비가 계속 오면서 추위에 떤 적이 많았고, 사진을 많이 찍느라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서 있으면서 몸에 무리가 많아 간 느낌도 든다.

 

그래도 이렇게 돌아보며 현재의 상태를 살펴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일단 지금은 안정이 필요한 상태이니 앞으로의 일정을 가볍게 하면서 청결에도 신경쓰며 여정을 진행하도록 해야겠다. 몸과 마음이 건강해야 걷는 것도 즐겁게 할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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