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 아세보의 숙소에서 눈을 떴을 때 하늘은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고, 오늘도 비가 올 것 같다는 생각에 그에 대비한 준비를 단단히 하고 나섰다. 전날 젖은 신발은 아직 축축해서 신자마자 양말이 금방 젖었다. 그렇게 나선 이번 순례길은 축복의 시간이 되었다.

 

 

비가 조금씩 오다말다 하기는 했지만 오전 중에는 거의 내리지 않았고 어제 비가 와서 만들어진 구름과 안개들이 햇빛과 어우러지면서 레온산맥을 멋지게 수놓고 있었다. 머물렀던 곳이 산 위쪽이어서 거기로부터 내려가며 산맥의 모습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감탄에 거듭된 감탄. 보이는 풍경마다 포토존이 되어 걷는 속도가 도무지 나지 않았다.

 

 

첫번째 들린 마을은 여전히 산 속에 있었다. 허름해보이는 초입을 지나가자 예쁜 휴양지 느낌의 마을이 나타났다. 마을을 지나면서 새로운 풍경이 드러났다. 안개가 서서히 내 쪽으로 밀려들면서 안개 속에 잠겨버리기도 했다. 신비로운 숲을 지나가는 듯 하면서 몽롱해지는 기분.

 

 

산 속의 날씨는 변화무쌍하여 그렇게 안개가 피어올랐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그것을 바라보며 자연의 신비에 또 한번 감탄! 레온산맥과 헤어지기 싫은 듯 잘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며 두번째 마을에 도착하게 되었다.

 

몰리나세카
몰리나세카

 

이곳은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잘 정비되고 세련된 도시 느낌을 주는 마을이었다. 자연과 건물이 조화를 이룬 예쁜 동화 같은 느낌도 들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던가. 시간이 11시가 넘어가고 있었는데 아직 한끼도 못 먹은 상태라 여기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먹은 건 초코가 들어가 있는 크로와상과 커피. 양은 적었지만 만족스러운 맛이었다.

 

 

여기서 오늘의 목적지로 정한 폰페라다까지는 2시간 정도의 거리. 금방 도착할 줄 알았으나 도중에 나온 예쁜 풍경도 구경하고 이 다음에 들린 마을에 다다랐을 때 멀리 보이는 성당이 가보고 싶어 다녀오느라 시간이 꽤 지나갔다.

 

 

그리고 폰페라다까지 진입하는 데는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멀리 보이는 도시의 모습은 크기도 했지만 몹시 인상적이어서 시선을 떼기가 어려웠다.

 

폰페라다
폰페라다

 

시간을 지체하게 만든 건 또 있었다. 폰페라다에 진입했을 때 갈림길이 하나 나왔다. 하나는 까미노 표시, 다른 하나는 알베르게 표시로.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는데, 앞서가던 순례자들은 모두 알베르게 표시로 갔다. 엉겹결에 나도 그쪽으로 따라갔는데, 도시의 중심부로 진입하는 느낌이 들자 다시 갈림길로 돌아가 까미노 표시가 나 있는 길로 향했다. 더 돌아가는 길일수도 있지만 그 길로 가는 게 낫다는 판단이 들었다. 또 그렇게 가고 싶었다. 알베르게로 곧장 가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고.

 

 

이런 경우에는 남들 따라갈 게 아니라 소신있게 가면 된다는 것을 느꼈다. 시간은 더 걸렸을 수도 있었겠지만 후회가 남진 않았다. 오히려 알베르게로 가는 길로 갔다면 까미노 표시로 나 있는 길을 가보지 않아 미련이 남았을 것이다. 

 

 

그렇게 까미노 표시로 난 길을 걸어가며 주변에 보이는 건물과 풍경들을 구경하다 슬슬 힘들어질때알베르게를 찾아갔다. 알베르게는 약간 외곽 쪽에 위치하고 있어 가는 데만 시간이 꽤 걸렸다. 그래도 시설은 괜찮아 보였다. 4인실 방을 배정받고 들어가 짐만 정리해놓고 바로 근처 마트로 향했다. 너무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폰페라다-알베르게
폰페라다 알베르게

 

사온 것을 먹으면서 주변을 둘러보려 했는데 날이 춥게 느껴져 다시 마트에 들러 필요한 것을 마저 사고 숙소로 돌어가 옷을 껴 입었다. 사온 빠에야를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으려고 꺼냈다가 그제서야 숙소에 전자레인지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미리 숙소시설을 알아보고 먹을 것을 사야겠다는 교훈을 얻으며 마트로 가서 빠에야를 환불하고 본격적인 도시 탐방을 시작했다.

 

 

날이 금방 어두워졌지만 어둠 속 조명에 비친 성당 그리고 중세 시대의 있었을 법한 성곽의 모습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낮에 잠깐 보던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비가 추적추적 오고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돌아다니다 배터리가 떨어져 사진을 찍을 수 없게 되었고, 숙소로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왔던 길로 가지 않고 모르는 길로 들어간 게 화근이었다. 이리저리 길을 헤매다 사람들에게 묻기도 했지만 도시가 넓어서 방향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한참을 이리저리 분주히 다니다 겨우 가는 길을 찾게 됐다. 

 

모르는 길을 계속 다니다보니 불안하고 초조했었는데, 모르는 곳을 다닐 때는 아는 건물이나 길을 길잡이 삼고, 그것도 없으면 큰길을 따라가는 게 불필요한 시간 낭비를 줄이는 방법임을 교훈으로 남긴 시간이었다(오늘 교훈만 두번째...).

 

그렇게 숙소로 들어와 늦은 저녁을 먹고 전에 봤던 한국인들을 만나 그동안의 얘기를 나눴다. 길을 헤매느라 시간을 허비한 건 아까웠지만 아는 사람들과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며 이날의 여독을 조금은 풀 수 있었다. 

 

손목 쪽에 뭔가에 물린 자국이 있고 간지러워서 신경이 좀 쓰인다. 이제 산티아고까지는 길어야 10일 정도 남았다. 최종 목적지에 도착하는데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하루하루의 시간에 집중하며 충실하게 보내려 한다. 그리고 길 위에서 배운 교훈과 깨달음을 삶에 녹여가며 날마다 나아지는 내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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