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을 자며 하룻밤 보냈지만 이름이 어려워 잘 기억나지 않는 마을을 떠나 오늘의 순례길을 나섰다.

 

 

침부터 잔뜩 흐린 날씨가 계속됐다. 첫번째로 도착한 마을은 전날 머물렀던 곳보다 더 오래되어 보였다. 입구에는 돌담이 늘어서 있었고 대부분의 건물이 낡았는데, 그것이 오히려 정겨운 느낌을 줬다.

 

 

다음으로 도착한 마을은 오르막이 인상적이었는데, 브런치를 먹으려 식당을 찾다 마땅한 곳이 없어 작은 슈퍼에서 빵과 주스를 사서 허기를 채웠다.

 

 

마을을 막 벗어날 즈음 날씨가 점점 어두워지더니 비가 한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바로 가방을 비닐커버로 씌우고 우의를 꺼냈다. 그러자마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굿 타이밍!).

 

 

우의를 걸쳐입고 다시 걷기 시작하여 도착한 곳은 포세바돈이란 마을. 여긴 집들이 부서져 있는 곳이 많고 여기저기 공사를 하고 있었다.

 

 

여기서 점심을 먹기로 하고 바에 들어갔다. 치즈와 올리브를 곁들인 빵을 먹었는데 생각보다 맛이 괜찮았다. 거기에 초코우유까지. 우유는 가격이 저렴해서 시킨 것도 있었는데 빵과 함께 먹으니 매우 맛이 좋았다.

 

 

그렇게 점심을 해결하고 길을 나섰다. 이 구간부터는 길 위에서 홀로 가게 됐다. 고요하게 걸을 수 있었지만 계속 걷다보니 잡념이 떠오르기도 했다. 주로 안 좋은 감정들이 떠올랐는데, 아직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던 것들이 이럴 때 떠오르는 것 같다. 그럴 또한 걷는 것이 감정을 흘려보내고 털어버리는 방법이 되기도 하지.

 

 

그렇게 가다가 만하린이란 곳에 도착했다. 여긴 독특한 모양을 띤 집 한 채가 있었는데, 그곳이 곧 알베르게이자 마을이었다. 각 나라의 도시가 얼마나 떨어져있는지 보여주는 표지판이 보였고, 그 외에 잡다한 여러가지 물건들이 뒤섞여 있었다.

 

만하린
만하린

 

개와 고양이들도 곳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주인아저씨가 쫓아내도 금방 돌아와 아무렇지도 않게 앉아있는 모습이 재밌었다.

 

 

만하린에 오기 전 포세바돈을 지나 철의 십자가에 도착했을 때의 일이다. 예상했던 것보다 십자가의 크기는 작게 느껴졌지만 그 밑에 쌓여 있는 돌의 양은 어마어마했다. 여기에 가져온 돌을 올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얘기가 있었다. 미리 구한 돌을 한쪽에 살짝 올려놓고 소원보다는 다짐을 했다. 그러니 내가 여기 온 목적을 다시금 떠올려 볼 수 있었다.

 

철의-십자가

 

만하린에서 다음 마을로 가는 길에 아직 오르막이 남아있었다.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안테나 탑에서부터 내리막이 시작되었다. 오르막에 오를 때까지 비가 보슬보슬 내려 즐길 수 있는 수준이었는데, 내리막으로 들어서면서 비가 점점 거세지고 바람도 불기 시작했다. 날씨는 사나워지고 땅에는 돌들이 많이 껴있을 뿐 아니라 흙길이 젖으면서 물이 고여 흘러내리고 있었다.

 

 

몸은 점점 으슬으슬 추웠졌고, 질퍽질퍽해진 길에 걷기도 불편해졌다. 옆에 아스팔트 도로가 있어 거기로 가고 싶은 생각도 잠깐 있었지만 웬만하면 까미노길로 걷고 싶었다. 또 잘못 갔다가 길이 엇갈릴 수도 있기에 불편을 감수하고 흙길을 타면서 내려갔다.

 

그때는 마치 강원도 산 속의 한복판을 걷는 느낌이었다. 산들이 겹겹이 둘러싸여 있었고, 안개가 짙게 끼어 주위 모습은 보이지 않아 길만 보고 가는 형편이었다. 한참을 걸은 느낌이었는데도 마을이 보이지 않아 마음이 초조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면 끝장이라는 위기감이 들었고, 비가 오는 산길을 언제 또 걸어볼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니 걷는 게 좀 나아졌다. 그러다 알베르게 광고판이 눈앞에 나타났고, 1킬로가 채 남지 않은 것을 알고 힘이 났다.

 

 

걷다가 나온 귀퉁이를 도니 스윽 하고 마을 모습이 나타났다. 산 속에 있다보니 금방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신발에 물이 들어와 질퍽거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다행이란 생각을 하며 마을로 들어갔다.

 

춥기도 하고 비가 계속 와서 얼른 숙소를 잡고 싶었다. 그런데 처음 들어간 기부제 알베르게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무로 된 침대도 그렇고 가방을 멀리 분리해둬야 한다는 얘기에 머무는 것이 망설여졌다. 게다가 음산한 분위기까지 느껴져 여긴 아니다 싶어 나왔다. 다음으로 간 곳은 호텔에 딸려 있는 숙소였는데, 샤워실이 불편하게 되어 있어 여기도 탈락. 한참을 더 돌아다니다 바에 딸려 있는 알베르게를 택했다. 그나마 가장 나은 곳이었다.

 

빨래와 샤워를 하고 나오니 밖에는 비가 그쳐 있었다. 슈퍼에 들리려고 나왔는데 문이 닫혀 있었고, 다시 비가 오기 시작하여 얼른 숙소로 되돌아왔다. 어디 나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머무는 곳의 바에서 저녁을 해결하기로 했다. 또르띠아와 카모빌 한잔을 시켰다. 따뜻한 차를 마시니 목이 좀 아팠던 것도 사라지면서 몸이 따뜻해졌다.

 

 

그렇게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오니 외국인 남녀 한쌍이 한 침대에 엉겨 있는 게 보였다. 지나친 애정행각에 민폐란 생각을 하면서 거기를 빠져나와 하루 정리를 하다가 피곤함에 돌아가 잠을 청했다.

 

비가 와서 마을에 도착했을 때 사진도 못 찍고 제대로 구경을 못했는데, 다음날 아침에 비가 많이 내리지 않으면 한번 쭉 둘러봐야겠다. 산 속에 있는 마을이라 날씨가 변화무쌍할 것 같긴 하지만 날만 좋으면 꽤나 예쁜 마을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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