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고스를 바로 떠나기엔 조금 아쉬움이 있었다. 도시의 규모가 커서 짧은 시간 안에 다 둘러보지는 못하지만 산타 마리아 성당은 가기 전에 한번 더 보고 싶었다. 마침 일요일이라 성당 예배도 보고 가기로 했다. 

 

아침햇살에 비친 성당의 모습은 어제 볼때처럼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그 모습을 담고자 사진을 찍고 있는데 갑자기 누가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누구지 하고 봤는데 매그너스라고 본인을 밝히자 그제서야 알아봤다. 전에 같이 순례길을 걸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고 이번엔 안경을 써서 생소했던 것.

 

부르고스-대성당
부르고스 대성당

 

어쨌든 다시 봐서 무척 반가웠다. 매그너스는 부르고스가 순례길의 종착지라고 했다. 이후엔 빌바오로 넘어간다고 하더라.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는 얘기를 끝으로 그와 작별인사를 나눴다. 반갑게 헤어졌는데 나중에 같이 사진 한장 남기지 못한게 아쉬움으로 남았다. 옆에 멋진 성당도 배경으로 있었는데 말이지. 이런 생각이 든 건 짧으나마 그와 길에서 걸었던 시간이 좋아서 그랬던 것일까.

 

 

그와 헤어지고 성당으로 들어가 예배하는 것을 보았다. 큰 감흥은 없었다. 성당을 나오자 배가 고픔을 느꼈다. 어제 사둔 빵과 주스를 먹었는데 그것으로는 부족해 어제 들린 마트로 갔지만 문이 잠겨 있었다. 그래서 오는 길에 봤던 추러스 트럭에 가서 추러스를 사 먹었다. 그런데 가격도 비싼 편이었지만 무엇보다 맛이 없었다. 그냥 기름 튀긴 맛만 강하게 입안을 맴돌았다. 이런 것도 배움이 된다. 이런 음식은 안 사먹어야겠다는.

 

이제 부르고스를 나설 시간이다. 도시에 들어올 때보다 나갈 때가 표시가 잘 되어 있어 금방 빠져나올 수 있었다. 건물들이 점점 사라지고 익숙한 들판의 모습과 흙길이 나타나자 부르고스를 벗어난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렇게 순례길은 다시 시작되었다.

 

 

여기서부터의 길은 뭔가 새롭게 시작되는 느낌이 있었다. 풍경이 전과는 좀 달라져서 그런 것 같았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실제로 주마다 특색이 다르고 풍경의 모습이 조금씩 달라진다.

 

 

부르고스에서 시간을 보내다 와서 그런지 길에는 사람이 없었다. 그야말로 드넓은 들판을 혼자 걷고 있었다. 들판에 언덕들이 듬성듬성 보이고 색깔은 잿빛과 회색빛으로 뒤덮여 황량함이 느껴졌다. 왠지 모를 외로움도 밀려들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순례길에서는 사람들이 텀을 두고서라도 있었는데 이번엔 혼자서 계속 걷게 된 것이다. 부르고스에서 길이 많이 갈려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부르고스가 마지막 여정이었던 사람들도 꽤 됐던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쓸쓸함을 느끼며 걷다가 자전거를 탄 순례자를 보았다. 그에게 인사를 하니 그도 화답을 했다. 그랬더니 기분이 갑자기 좋아졌다. 이렇게 누군가와 잠깐 인사를 한 것만으로도 기분이 바뀔 수 있구나... 사실 순례길에서 서로 인사를 나누는 건 자유고 인사를 한다고 늘 받아주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내가 먼저 인사를 했기에 상대방으로부터 응답을 받은 것인데, 이로부터 뭔가 깨닫는 게 있었다. 그리고 혼자 걷는 것도 괜찮다고 여겨졌다. 외롭고 쓸쓸했던 감정도 가시기 시작했다. 

 

사실 걸을 때 앞으로 무슨 일을 할 지에 대해 계속 생각하다가 기분이 다운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걷고 있는 이 곳과 이 순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생각을 하자 마음가짐이 달라지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주변을 보니 좀 더 충분히 음미하며 즐기고 싶어졌다. 이후 즐거운 마음으로 주변 풍경을 즐기면서 나아갔다. 발이 아직 아픈 부분이 있긴 했지만 대체로 호전되어 걷는 것도 수월했다. 그렇게 걷고 걸어 오늘의 목적지인 오르니요스 델 까미노에 도착했다.

 

 

그런데 숙소를 잡으러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불쾌한 일이 생겼다. 부르고스에서 처음에 머물려 했던 알베르게는 따뜻한 물만 나와 결국 다른 곳으로 갔는데, 이곳 알베르게도 그렇지 않은가 확인을 해보려 했다. 그런데 사설 알베르게인데도 미리 내부를 보여주려 하지 않았다. 건너편에 다른 알베르게가 있었으나 크게 다를 것 같지 않아 그냥 묵기로 했다. 

 

그런데 짐을 풀고 샤워실에 갔더니 여기도 따뜻한 물만 나오는 게 아닌가. 당황스러워서 관리인한테 설명을 하고 환불을 받으려 했다. 그런데 이 관리인이 처음엔 못 알아듣는 척 하더니 계속 얘기하자 갑자기 흥분을 하면서 환불을 못하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아직 사용한 것도 없는데 왜 안되냐고 하자 이번엔 화를 내며 다짜고짜 여기 있던지 나가던지 하라는 것이다. 나갈 거니까 환불해달라고 하니 이번엔 경찰을 부르겠다고 하는 게 아닌가!

 

어이가 없기도 하고 순간 짜증이 올라와 그렇게 하라고 할려다 괜히 소란 피우고 싶지 않아 그냥 돌아섰다. 잠시 고민하다 그래도 환불도 받지 못하고 나가는 건 아까워서 그냥 있기로 했다. 이상한 관리인때문에 기분이 상하긴 했지만 그런 사람 때문에 계속 감정 소모할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일단 씻기 위해 샤워실로 다시 들어갔다. 예상대로 뜨거운 물만 나왔다. 다행히 세면대에는 찬물이 나와서 얼른 몸을 씻고 나서 부족하나마 찬물로 다시 몸을 헹궜다. 세면대의 물로는 몸 일부만 적실 수 있었고, 이렇게 하다보니 시간도 많이 걸리고 피곤해졌다. 이 일로 이후로는 귀찮다고 대충 숙소를 결정하지 않기로 했다. 

 

오늘 알베르게를 공립으로 가지 않고 사설로 온 것은 와이파이가 되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글을 쓰거나 필요한 정보를 검색하는 것은 숙소가 아니더라도 와이파이가 잡히는 곳에서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것을 깨닫고 오늘 같은 선택은 다시는 하지 말자고 결심했다. 이 역시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이니 좋게 생각하는 걸로.

 

샤워를 하고 나와 근처 상점에 갔을 때는 이미 문이 닫혀 있었다. 그래서 가까운 바로 갔는데 또르띠아를 저렴한 가격에 팔고 있었다. 음료가 없어 좀 퍽퍽하긴 했으나 저녁끼니로는 충분했다.

 

사실 오늘 목적지는 원래 이 곳 말고 그 이전 마을을 생각했었다. 부르고스를 돌아보느라 늦게 출발했고 오늘은 평소보다 더 걸을 것을 생각했는데, 막상 염두에 둔 목적지에 도착해보니 오후 2시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그대로 머물기엔 시간이 좀 아까웠고 그래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알베르게 소동이 있었지만 그래도 여기로 온 것을 후회하진 않는다. 마음따라 온 것이니 오직 머물 뿐(무슨 도사라도 된 것인가).

 

이번 순례길은 걷는 것도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내가 선택하고 그 결과를 받아들일 줄 아는 게 인생임을 느끼며 앞으로의 순례길도 잘 해보자고 되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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