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날씨가 심상치 않았다. 새벽에 깼을 때 비오는 소리가 들렸다. 숙소를 나갈 때쯤 날이 개는 듯 해서 비가 안 올꺼라 생각했지만 마을을 채 벗어나기도 전에 빗방울이 하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배낭을 내려놓고 얼른 커버를 덮어 씌웠다. 다행히 그 이상 더 내리진 않아 배낭을 다시 둘러메고 길을 나섰다.

 

 

날이 점점 흐려지더니 빗방울의 수가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발상태도 좋지 않아 빨리 걷지는 못한 채로 첫 마을 아소프라에 도착했다. 잠시 쉬려고 성당 앞에 앉아있는데, 갑자기 비가 거세지기 시작했다. 점점 많이 내리는 비를 보며 오늘 일정을 어떻게 할지 고민이 됐다.

 

아소프라
아소프라

 

이 곳 아소프라는 알베르게가 유명했는데, 대부분의 알베르게가 2층 침대인 것과 달리 여긴 단층침대였다. 게다가 2인 1실! 계속되는 2층 침대의 불편함을 겪고 있는 내게 그 조건은 무척이나 달콤하게 느껴졌다. 더구나 여기서 다음 마을까지는 2시간 넘게 계속 걸어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비가 쏟아져 내리는데 계속 가기보다 차라리 여기서 머물면서 하루 쉬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유혹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일단 비가 계속 오니 배낭 속 깊이 넣어두었던 우의를 꺼내 입었다. 순례길 들어 처음으로 입어보는 우의였다. 막상 우의를 입으니 걸어가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지는 게 느껴졌다. 잠시 걷다 보니 마을길이 끝나고 있었고, 날 유혹했던 알베르게도 눈앞에 보였다. 

 

단호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마을을 벗어나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사실 이대로 머물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걷기 시작한 길이 그렇게 험난할 줄 이때는 미처 몰랐다.

 

 

비가 거세기는 했지만 그래도 얼마 동안은 걸을만 했다. 그런데 갑자기 바람까지 세차게 불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바람에 비가 실려오면서 우의가 시야를 가렸고,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거의 땅바닥만 보면서 걷는 시간이 이어졌다. 

 

주변 풍경도 제대로 못보면서 걷는구나 하고 안타까움이 일어난 것도 잠시, 어느 순간 비바람을 헤쳐가며 걷는 것이 재밌어졌다. 언제 또 이렇게 걸어볼 수 있겠는가. 그 와중에 다행스러운 것은 발상태가 갑자기 좋아진 것! 워낙 비바람이 세차게 불다보니 통증이 마비가 되서 그런건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지금까지 걸었던 것 중에 가장 멀쩡하고 빨리 걸을 수 있었다. 평소 속도의 3배는 빠르게 걸었던 것 같다. 날씨가 이러니 빨리 가고 싶은 마음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 덕분에 2시간 반 걸린다는 거리를 1시간 반만에 주파했다. 빨리 걷기도 했지만 날이 좋을 때는 중간에 멈춰서 사진도 찍고 감상도 했던 것을 비바람이 오로지 앞만 보며 나는 듯이 가게 만들었기에 그런 놀라운 이동이 가능했다.

 

거센 비바람을 한참 헤치고 걷다 마을이 보이자 와락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때는 방수가 잘 되는 신발도 비가 들쳐 많이 젖었고 발도 다시 아파지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마을에 도착했을 땐 몸도 마음도 지쳐있었다. 이미 흥건히 젖은 신발과 양말을 벗어 한쪽에 말리고 점심거리를 꺼내먹으며 한숨을 돌렸다. 

 

 

충분히 휴식을 취한 후 재정비를 하고 길을 나섰다. 다행히 밖은 비가 거의 그쳐 빗방울만 조금 내리는 수준. 발상태가 비올때 걸을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개인 날씨를 보니 가벼운 마음으로 걸을 수 있었다. 

 

이윽고 비가 그쳤고, 날이 갠 주위 풍경은 그야말로 끝내줬다. 아직 먹구름은 군데군데 끼었지만 하늘의 모습이 시시각각 변화무쌍하게 바뀌면서 멋진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문득 아소프라에서 머물지 않고 출발한 걸 잘했다고 느꼈다. 거센 비바람을 뚫고 어렵게 온만큼 성취감이 있었고, 또 비가 왔기에 볼 수 있는 풍경을 볼 수 있었으니. 아소프라에 그대로 머물렀으면 겪을 수 없던 일이었다. 그렇게 순례길의 후반부는 감탄사의 연속으로 이어졌고, 그렇게 오늘의 목적지 산또 도밍고로 입성했다.

 

산또-도밍고
산또 도밍고

 

산또 도밍고는 생각보다 큰 곳이었다. 도시라 불릴만한 규모를 가지고 있었고 성당도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높이 솟아있었다. 군데군데 조형물도 눈에 띄었다.

 

 

무엇보다 머물게 된 알베르게가 마음에 들었다. 큰 규모의 건물에 깔끔한 침대가 가지런히 놓여져 있었다. 거기에 주방과 식당, 화장실과 욕실도 크기나 개수면에 있어서 만족스러웠다. 덕분에 순례길 들어 가장 맘편히 빨래하고 샤워할 수 있었다.

 

산또-도밍고-알베르게
산또 도밍고 알베르게

 

저녁식사도 어느 때보다 푸짐하고 기분좋게 먹을 수 있었다. 이전 알베르게에서 마주친 적이 있는 한국인 부부가 저녁을 함께 먹자고 초대해준 것이다. 근처 마트에서 포도주를 한 병 사들고 가보니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나는 닭백숙과 밥이 준비되어 있는 게 아닌가! 거기에 이미 까놓은 포도주도 있어 곁들어 먹으니 기분좋은 알딸딸함에 제대로 영양보충을 한 느낌이었다. 

 

그렇잖아도 비도 많이 맞고 해서 오늘 저녁은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싶었는데, 감사하게도 이런 식사를 함께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오랜만에 모국어로 이야기도 나누면서 기력을 회복하는 시간이었다. 사간 포도주는 선물로 드렸는데 아저씨가 술을 좋아하시는 것 같아 잘 샀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헤라에서 산또 도밍고까지의 여정은 여러모로 의미가 있었다. 처음으로 우의를 입었고, 첫날 이후 처음으로 좋은 발상태로 걸을 수 있었다. 또 처음으로 한국사람들과 주방에서 만든 음식을 먹은 날이었다. 어찌보면 소소한 것일 수도 있지만 순례길 위에서 겪었던 이번 경험들은 결코 작게 다가오지 않았다.

 

옥의 티라고 할까. 알베르게의 첫인상과 시설은 참 좋았는데, 저녁이 되자 인터넷 연결이 되지 않았다. 알고 보니 와이파이를 꺼버린 것이었다. 이런 상태는 다음날 아침까지도 이어졌다. 거기 직원에게 물어보니 와이파이 서비스를 저녁에 종료했으니 더 사용할 수 없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었다. 

 

어이가 없고 씁쓸하기도 했다. 명색이 공립 알베르게인데 그런 식으로 운영을 하는 것은 매우 안 좋은 인상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아예 와이파이 서비스가 없는 곳을 빼면 순례길에서 머물렀던 곳 중 이렇게 운영하는 곳은 이곳 뿐이었다). 최고의 알베르게로 기억될 수도 있었는데 그게 어그러지자 좀 안타깝기도 했다.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어 침대에 누웠다가 초장부터 우레같이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잘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는 걸 직감하고 이불을 들고 방을 나왔다. 여긴 넓은 만큼 주방 근처에 큰 쇼파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거라도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소파에 몸을 묻고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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