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찌감치 새벽에 일어나 피스테라로 떠날 준비를 했다. 간밤에 밑에 자던 아줌마가 코를 심하게 골아대서 다른 방으로 옮겨 잠을 잤다. 덕분에 나갈 준비할 때는 소리나는 것에 신경쓰지 않아도 됐다. 나가기 전 일출을 보려고 테라스로 올라갔는데, 해가 막 뜨려는 모습이 보이긴 했지만 금방 떠오를 것 같지는 않아 걸어가면서 보기로 했다.

 

묵시아
묵시아

 

숙소를 나와 바닷가를 옆에 두고 걷기 시작했다. 묵시아와 피스테라 구간이 사실상 배낭을 매고 긴 길을 걷는 마지막이기도 했고 그 사이를 걸으면서 어떤 풍경들을 보게 될지 기대가 됐다. 가면서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일출은 가는 쪽이 해가 뜨는 방향으로 트여 있지 않고 높은 언덕이 가리고 있어서 보지 못했다. 그래서 일출도 피스테라에서 보는 걸로 그 아쉬움을 채우기로 했다.

 

 

바닷가를 보면서 아침에 걸으니 기분이 좋기도 하고 남달랐다. 순례길에서는 늘 산길이나 들길을 걸었기에. 파도가 철썩거리는 풍경과 소리를 보고 들으니 가는 발걸음이 경쾌했다. 그렇게 가던 길은 차도로 이어졌고 그러다 산길로 들어서면서 그때부터는 순례길 때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순례길 때 워낙 다양한 자연의 모습을 봐서 그런지 여기 구간을 지날 때 큰 감흥은 느껴지지 않았다. 새로운 나무를 봤을 때 호기심이 간 것 외에는 크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앞으로 할 것에 대해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이 구간에서는 나와 같은 방향으로 걷는 사람이 없을 줄 알았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니 생기기 시작했다. 한참 걷다가 간이로 쉴 수 있는 곳을 발견했다. 거기서 쉬고 있는데 같은 방향으로 한 남자가 다가왔다. 예전에 본 적이 있던 인상이 별로 좋지 않은 사람이었다. 뭔가 껄렁하고 불만스런 표정으로 길을 가던 사람이었는데 이번에도 똑같은 느낌으로 내가 있던 곳에 잠깐 들어오더니 가버리더라. 그 모습을 잠깐 본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지 않은 게 꽤 지속됐다.

 

 

그 무렵 다른 순례자들도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이 구간은 피스테라에서 묵시아로 가는 이들이 많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그들과 인사하며 엇갈리는 게 재미있었다. 중간쯤 가다가 들린 마을에서 날보고 놀라는 여자가 있길래 보니 순례길 초반에 세라와 함께 걷던 태국인이었다. 나도 반가워서 안부를 묻고 가는 방향을 확인하면서 인사를 나눴다. 세라는 팜플로나까지만 걷고 돌아갔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게 됐다. 그 태국인 여자 지나칠 때보니 살이 많이 빠져있더라. 그래서 처음에 잘 못알아 봤을지도.

 

 

꽤 오래 전에 봤던 사람을 만나 인사를 나누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때부턴 즐거운 마음으로 길을 걷게 됐다. 하지만 그 기분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그러고보니 이날만큼 악재가 여러번 겹친 적이 없었는데...

 

기분 좋게 길을 걷다 어느 마을에 들렀을 때였다. 경사진 구간을 오르느라 힘이 든 상태였다. 그러다 까미노 표시를 발견했는데, 두 개의 표시가 반대방향으로 되어 있었다. 오던 방향은 아닐 것이기에 다른 쪽으로 갔는데 다시 처음 도착한 곳으로 오는 게 아닌가. 표시를 잘못 봤나해서 한번 더 표시를 따라갔는데 잘 보고 간다했지만 또다시 같은 구간을 돌아 제자리로 돌아왔다. 똑같은 장면을 세번씩이나 보니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 더구나 그 마을은 경사구간이라 그렇게 뺑뺑 돌면서 땀도 삐질삐질 났다. 

 

근처 마을주민에게 물어서 갔다가 또 다른 주민아저씨가 거기가 아니고 다른 쪽으로 가야한다 하길래 의구심이 들면서도 알려준 대로 가봤다. 그러자 안 가봤던 오르막으로 올라갔는데 주변에 표시가 없어서 긴가민가 하다가 곧 표시가 나타났고 그제야 안심이 됐다. 사실 그 아저씨가 실실 웃으면서 가려고 했던 방향이 아니라고 할 때 장난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했는데. 감사한 아저씨 같으니라고.

 

어쨌든 그 구간에서 헤매느라 시간이 30분 이상 지체되면서 몸도 힘들었지만 심리적으로도 타격이 있었다. 그게 또 육체적으로도 영향을 많이 미치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도 피스테라로 빨리 가고 싶은 마음이 강했는지 발걸음이 늦추어지진 않았다. 오히려 지체된 것에 대해 마음이 조급해져 나중엔 스스로 릴렉스하기도 했다. 

 

계속 산길만 걸어 이 구간은 바다를 보며 걸어도 좋겠다 싶었는데, 멀리서 파도소리가 들리더니 곧 바다가 스윽 모습을 잠깐 드러냈다. 그러다 좀 시간이 지나면서 완연한 바다를 볼 수 있었다. 기분이 좋아지고 피스테라가 적힌 표지판이 나타나자 곧 도착할 것 같은 마음에 발걸음도 가벼워졌다.

 

 

그때부터는 아스팔트길이 이어지고 까미노 표시가 보이지 않았는데, 그 길이 해안쪽 도로길이었고 까미노길과는 좀 떨어져 걸었다는 것을 한참 후에야 알게 됐다. 보이던 바다는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마을들을 거치며 한동안 걷게 되었다. 표지판은 나왔지만 피스테라는 한참을 더 가야 했다. 버스정류장 같은 곳을 봤을 때 잠깐 쉬려고 배낭을 내려놓았는데, 그 앞집에 있는 개가 쉴새없이 짖어대느라 결국 얼마 쉬지도 못하고 다시 출발하고 말았다. 계속 짖어대는데 짜증도 나고 화도 치밀어오르고... 하마터면 개를 한 대 칠뻔할 정도로 그때는 기분이 그랬다.

 

 

그렇게 길을 계속 걷게 되었고 여러 마을을 거치자 커다란 산과 더불어 바다가 보이는 마을에 오게 됐다. 이제야 왔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거기는 초입도 아니었다. 마치 리조트를 연상시키는 넓은 건물들이 바다를 따라 이어졌고, 까미노 표시를 따라 한참을 더 오르락내리락 간 후에야 피스테라의 입구를 알리는 표지판이 나타났다. 거기부터는 마을이 쭉 이어져 있었는데, 표지판을 보고 나서야 피스테라에 진입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예상보다는 일찍 도착한 거여서 좋았다.

 

피스테라
피스테라

 

잠시 벤치에 쉬면서 바다를 감상하다가 동네를 둘러 보며 숙소를 찾았다. 알베르게가 많기도 하고 흩어져 있어서 여기저기 둘러보다보니 시간이 꽤 흘렀다. 본 곳 중 마음이 갔던 곳을 정해 짐을 풀었다. 곧 일몰이 가까운 시간이 되서 대강 정리하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피스테라-알베르게
피스테라 알베르게

 

그런데 주위를 둘러봐도 해가 보이질 않는 것이었다. 높은 곳에 올라가보니 여기는 서쪽이 높은 산으로 막혀 있어 일몰을 볼 수 없는 지형이었다. 괜히 서둘렀다 싶은 생각과 함께 힘이 빠지기도 했지만 석양에 비친 바다의 풍경이 괜찮았기에 천천히 감상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제는 신지 않는 헌 양말들을 바닷가쪽으로 들어 보이며 순례길 동안 동고동락해서 수고했다고 치하해주며 고이 봉지에 싸서 버렸다. 원래 이것들은 피스테라에 와서 태우려고 지금껏 보관해 뒀던 건데 이제는 태우는 게 불법이 됐다고 해서 이렇게 의식(?)만 치르고 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한때의 추억을 보내고 마트에 가서 먹을 것과 필요한 것을 사서 숙소로 돌아갔다. 주방에는 사람들로 차 있어서 조금 이따 먹기로 하고 먼저 빨래와 샤워를 했다. 그런데 샤워를 하다 헤드기의 날카롭게 삐져나온 부분에 배어 피가 나올 정도로 상처가 나버리고 말았다. 쓰리기도 하고 짜증도 났지만 일단 샤워를 마치고 나서 약과 밴드를 발랐다. 그렇게 마치고 내려와 처음 사본 일본식 컵라면과 빵을 맛있게 먹었다. 그때 시간이 밤 9시 가까이 되었는데, 그게 사실상 첫끼였다. 이런 식이니 살이 빠질 수 밖에. 잠시 밖으로 나와 별을 보면서 소화를 시키고 돌아왔고, 낼 다시 돌아갈 산티아고에서 머물 곳을 예약한 후 잠을 청했다. 

 

오늘 도착한 피스테라는 묵시아와는 느낌이 많이 달랐다. 똑같은 바다가 보이는 마을임에도 묵시아는 사방이 뚫려 있는 조용한 느낌이라면 피스테라는 마을들이 연이어져 하나의 리조트 같은 느낌이 있었고, 바다가 근처에 있어서 그렇지 규모가 있는 여느 마을과 크게 다른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 

 

두 군데 중 하나만 꼽으라면 묵시아이다. 조용하게 바다를 온전히 즐기며 편안히 쉴 수 있는 묵시아의 느낌이 훨씬 기분 좋게 다가온다. 피스테라가 별로라는 건 아니다. 피스테라도 바다가 보이는 풍경이 예뻤고 이렇게 와 봤기에 그 느낌을 알 수 있었으니, 두 군데 다 들린 것은 좋은 선택이었다.

 

피스테라로 오는 길에는 악재가 여럿 있었다. 한 마을을 세번씩이나 뺑뺑 돌았던 것, 쉬려고 하다 개가 계속 짖어대는 바람에 쫓겨나듯 간 것, 아스팔트 피하려고 풀밭을 걷다가 똥을 이번 여정에서 처음 밟은 것(털어낸다 했는데 지금도 붙어 있다), 일몰을 막힌 지형때문에 보지 못한 것(피스테라에서 풀려고 했던 아쉬움들은 이제 어디서 풀어야 하나...), 샤워를 하다 배를 베인 것, 물웅덩이를 피해 걷다가 가시에 찔려 허벅지에 상처가 난 것. 이렇게 나열해 보니 진짜 많았네! 그것도 하루 동안. 

 

마지막으로 걸은 까미노길이 순탄치만은 않았지만 액땜한 것으로 좋게 생각하련다. 대륙의 끝이라는 피스테라에 와서 이렇게 유종의 미를 거둔 것에 의미를 두고 싶다.

 

'산티아고 순례길' 이야기는 여기서 마칩니다. Graci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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