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사르에서 출발할 때 전날처럼 오버페이스를 하지 않기 위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걸어도 시간이 지나면서 스퍼트가 올라가고, 자연스럽게 자기 속도로 걷게 된다.

 

곤사르-알베르게
곤사르 알베르게

 

아침에 오랜만에 안개가 끼지 않아 시야확보가 됐지만 날이 흐렸고,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초반에 오르막들이 있었는데 올라가면서 비가 조금씩 내리더니 나중엔 우의를 입어야 할 정도가 되었다. 그러면서 안개도 피어오르기 시작하고. 전형적인 갈라시아 날씨가 다시 나타난 것이다.

 

 

처음에는 비도 맞을만 하다가 계속 내려서 어느 마을에 잠깐 들러 우의를 챙겨 입었다. 그렇게 다시 출발을 해서 리곤데라는 곳을 지나고, 그 다음 마을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거기서 들어간 식당 이름은 리곤데. 마을 이름이랑은 달랐지만 리곤데가 근처에 있어서 그렇게 이름을 지었나보다. 

 

 

이 식당이 기억에 남는 건 먹은 음식 때문이었다. 여기서 시킨 음식이 '리곤데 샌드위치'였는데, 일단 비주얼부터가 풍성하여 남달랐고 가성비가 뛰어났다. 참치에 토마토 그리고 햄과 야채가 층층이 쌓여 있어 다 먹고 나니 배가 불렀다. 단일 음식을 먹고 그렇게 포만감을 느낀 건 그게 처음이었던 것 같다.

 

 

거기 식당에서 예전에 알베르게에서 한번 보았던 커플을 만났다. 그 중 여자가 인사하는 것도 그렇고 참 거시기하게(순화된 표현^^) 느껴졌다. 당시 음악소리를 엄청 크게 틀어놓으면서 자기집 안방마냥 요리할 때도 거슬렸는데 그 느낌이 남아있어서 그런지 더 그렇게 느낀 것 같기도 하고. 일단 인상도 그렇고 말하는 것도 영... 내가 다 먹고 나갈 때 인사를 건넸지만 여자는 보지도 않고 인사도 없었다. 그래서 나가면서 괜히 인사했나 싶기도 했고 내가 순례자들에게 인사하는 것을 의무적이거나 억지로 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렇게 할 필요는 없으니 편하게 하자고 생각하며 걸을 무렵, 문득 내가 하고 싶을 때 자유롭게 인사를 하거나 하지 않는 것처럼 인사받는 상대방도 그 인사를 받아줘야 할 의무는 없다는 걸 알게 됐다. 그 여자의 인상이나 행동으로부터 느낀 불쾌감과는 별개로 내가 인사하는 걸 똑같이 받아줘야 하는 건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인사를 할 때 상대방이 받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것도 친절한 미소와 목소리로. 지금까지 순례길을 걸으면서 순례자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보통 먼저 인사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상대가 받아주지 않으면 괜시리 기분이 상하는 경우들이 있었다. 사실 나는 인사가 하고 싶은 거였고, 그럴 때 기분이 안 좋았던 것은 인사받기 바라는 욕구가 충족되지 않아 그런 것이었다. 

 

이번 일을 통해 그것을 분명히 깨달으니 그 여자에 대한 미움이 사라졌다. 적어도 인사를 안 받아 준 것에 대해서는. 그 후로 두어번 길에서 더 보긴 했는데 길에서 시끄럽게 굴어서 거슬린 것은 있었지만 나중에는 봐도 별 신경쓰이지 않았다. 그저 길에 집중해서 갔을 뿐.

 

 

오전 길은 비도 오고 안개가 껴서 사진을 많이 찍지 않았고 길을 걷는 데 집중하게 되어 이동속도가 빨랐다. 그렇게 걷다가 '팔라스 데 레이'라는 곳에 도착을 했다. 생각보다 큰 곳이었고 알베르게들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팔라스-데-레이
팔라스 데 레이

 

여기서 좀 쉬고 목적지인 멜리데로 가려 했기에 쉴 곳을 찾아 까미노길을 따라가다보니 성당이 하나 나왔다. 문이 열려 있어 들어가보니 크지는 않았지만 깨끗한 의자가 배치되어 있었고 여기서 쉬면 좋겠다 싶었다. 거기 있던 할아버지가 스탬프를 찍을 수 있다고 알려줬는데, 찍으면 좋겠지만 여분의 칸이 없어 아쉽게 흔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그렇게 성당에서 잘 쉬고 길을 나섰다.

 

 

가다가 마트에서 물 한병을 샀는데 예상보다 비싸 갑자기 마음이 불편해졌다. 디아(규모가 있는 체인마켓)도 있는 걸 봤지만 거리가 멀어 여기서 산 건데 괜히 왔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내가 물 한병 가격에 그렇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니... 사실 대형마트가 물을 싸게 판매하는 것이지 거기가 특별히 비싼 것은 아닐 수 있다. 상대적으로 비싸게 느껴져서 그런 것이겠지.

 

 

까미노 표시를 따라가니 금방 마을을 빠져나왔다. 큰 마을을 그렇게 둘러보지 않고 금방 지나친 것은 처음이었는데, 그래도 성당에서 꿀 같은 휴식을 취하기도 했고 지나면서 본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그길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날씨가 화창해져서 오랜만에 강한 햇빛을 쐬기도 하고 숲길이 연속으로 이어져 걷기에 좋았다.

 

 

도중에 까사노바라는 이름이 인상적인 마을을 지나 계속 걷다가 점점 힘들어지는 게 느껴졌다. 오전부터 계속 걸어온데다 오후에도 별 휴식 없이 길게 걷다 보니 몸이 피로해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시간을 딱딱 나눠 쉬기보다 어느 정도 걸으면서 휴식이 필요하겠다 싶으면 잠깐이라도 배낭을 내려놓고 스트레칭이라도 해주는 게 좋겠다고 느꼈다. 다행히 쉴만한 벤치가 나와 잠시 쉴 수 있었다.

 

 

그렇게 다시 길을 나서고 멜리데까지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 한 마을에서 여유를 가지고 쉬기로 했다. 초콜렛으로 당보충도 하고. 이렇게 휴식을 취했는데도 길을 나설 때 다리에 힘이 별로 없었다. 긴 시간을 걷다보니 지쳐있었던 것 같아 속도를 줄여 가기로 했다. 그러고 보면 힘들때는 천천히 가고 속도를 낼 필요가 있으면 빨리 가기도 하면서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게 걷기의 매력이 아닌가 싶다.

 

 

큰 공장지대를 지나 걷다보니 상당한 규모의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리를 건너니 바로 멜리데 입구로 들어오게 되었다.

 

멜리데
멜리데

 

입구 근처에 있는 안내센터에서 알베르게 위치와 뽈뽀를 파는 식당을 알려줘서 그것을 살펴보며 걷다보니 마을 중심부에 도착했다. 저녁 6시가 아직 안된 시간이었는데, 숙소를 들어가기에 앞서 먼저 저녁을 먹기로 하고 뽈뽀를 파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생각보다 간단하게 나왔고 조금 짜기도 했지만 그래도 맛은 있었다. 생맥주까지 곁들이니 그날의 피로가 가시는 느낌이었다. 

 

뽈뽀
뽈뽀

 

다만 먹고 나갈 때 인사를 했는데도 본체만체하는 것을 보고 기분이 씁쓸해졌다. 뽈뽀로 유명한지는 몰라도 친절하지는 않구나... 나중에 누가 뽈뽀식당을 추천해 달라고 하면 여기는 추천하지 않을 것 같다. 맛도 중요하지만 친절도가 식당의 인상을 좌우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추천받은 알베르게를 갔지만 문이 잠겨 있었다. 날도 점점 깜깜해져 하는 수 없이 공립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래도 늦게 가서 그런지 빈자리가 있는 침대를 자유롭게 정할 수 있어 비교적 편하게 머무를 수 있었다.

 

순례길을 통해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배운다. 이 모든 게 내 자산이 되고 날 성장시키는 힘이 될 것이다. 순례길을 걷는 것은 어쩌면 수행의 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수행이란 마음을 고요히 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잠깐 흔들릴지언정 다시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런 관점에선 오늘 길을 걸으며 처음에 기분을 상하게 한 여자 순례자의 경우는 오히려 수행의 대상으로 삼을 수도 있는 것이다. 

 

남은 순례길도 내 마음 잘 살피고 알아차리면서 나아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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