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일차 순례길. 이제는 산티아고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실감나는 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오늘은 산티아고를 앞두고 100킬로 거리가 깨지는 날이었다. 사실 그런 것에 별 의미를 두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표지석을 앞두고 보여준 내 모습은 생각과는 많이 달랐다.


사리아에서 받은 인상이 썩 좋은 편은 아니어서 떠나는 마음이 편했다. 전날 신경쓰이던 것들도 길을 걸으면서 점점 털어버리게 됐다. 잠을 잘 못 잔 탓인지 졸면서 계속 걸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 산티아고까지 남은 일정을 얼마나 잡을지 생각해 봤다. 아마 4일이나 5일 정도? 처음엔 여유있게 5일 일정을 생각했는데 일단 오늘 걸으면서 정해보기로 했다.


자욱한 안개 속 아침길을 걷는 것으로 시작했다. 사리아를 빠져나갈 때도 안개가 많이 끼어 주변 모습들이 잘 보이지 않았다. 비도 부슬부슬오고. 비가 많이 오는 지역이라 듣긴 했는데, 갈라시아 지방은 대체로 이런 날씨가 보통 모습인 듯 싶다.


전날 미리 사리아의 모습을 살펴봤기에 별다른 감상 없이 안개를 뚫고 출구로 나왔다. 출구 부근에는 내리막길이 숲으로 이어져 있어 꽤나 인상적이었다.



안개는 점점 짙어지는 가운데 좀 더 가다보니 철도가 나왔다. 실제로 운행을 하는 철도로 보였는데, 안개가 자욱한 철도길의 모습은 그림 같았다. 안개가 시야를 가리기도 하지만 때로는 보고 싶지 않은 것을 가려주기도 하고 또 이렇게 그림 같은 풍경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 길을 가면서 나를 스쳐갔던 순례자 한 명이 있었다. 올라 하고 인사하며 지나간 그는 한국인처럼 보였는데, 혼자서 길을 가고 있었다. 한국인이 홀로 걷다가 웃으며 인사를 건넨 경우는 처음이어서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러면서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나의 경우, 길이나 숙소에서 한국인을 만나면 한국말로 보통 인사했는데 사실 여기는 스페인이고 까미노이다. 다 같은 순례자이고 한국인라고 특별히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건 없는데 내가 괜히 신경이 쓰여서 그들을 대하는 데 망설임을 가졌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 만날 때는 그가 한국인이든 외국인이든 편하게 인사하면 된다는 것을 그가 인사하는 것을 보고 느꼈다. 


그는 또 한국인답지 않게(?) 자못 여유 있는 걸음걸이로 가고 있었다. 길을 걷다 나오는 여러 것들에도 관심을 보였다. 남들이 보는 내 모습도 저러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가 앞에서 걷고 있을 때 멋진 숲의 풍경들이 나왔고, 그도 숲과 함께 내 사진의 배경이 몇 번 되어 주었다.




 

그렇게 가다가 문득 산티아고까지 가는 일정을 4일로 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빨리 가고 싶은 것보다도 일요일에 산티아고에 들어가 주말의 모습을 보고 싶었고, 순례자 여권의 스탬프도 산티아고에서 한번 찍으면 꽉 채워져서 그것도 맞추고 싶었다. 


그렇게 정하고 나니 하루에 얼마나 가야 하는 게 나왔고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안개길이라 곧장 걷는 데만 신경쓰면 되는 게 있었지만 하루에 가야할 거리가 꽤 된다고 느껴지니 서두르게 된 것도 분명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게 화근이었다. 그렇게 걷기 시작한 후로 몸이 점점 무거워지면서 힘든 게 느껴졌고, 걸으면서 처음으로 머리가 띵하고 아파왔다. 잠깐 쉬고 싶었지만 마땅히 들릴 만한 마을도 나오지 않았다. 두 시간을 내리 걸은 후 어깨가 심하게 아파 갈림길이 나오는 곳에 배낭을 내려놓고 쉬었다.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 


그런데 바로 앞에서 신경쓰이게 하는 여자가 있었다. 살펴보니 현대차에서 순례자를 위한 서비스 차원에서 물 등을 무료로 지원해주는 행사를 하는 듯 보였다. 홍보도 같이 하면서. 그때만 해도 가는 곳곳마다 먼저 와서 물 등을 주려고 하길래 뭘 요구하는 게 있는 줄 알고 거부를 했다. 실제로 필요하지도 않기도 해서 그렇게 자꾸 얘기하며 다가오는 게 길을 걷는데 맥이 끊기는 느낌을 받았다. 나중에는 봐도 그냥 편하게 인사하면서 별 신경쓰지는 않았는데, 초반에는 가뜩이나 머리도 띵해서 짜증이 올라오기도 했다. 스트레칭을 가볍게 해주며 몸을 풀어주고 그 여자를 피하듯 스쳐지나 다시 걷기 시작했다.



전날 사리아로 갈 때는 3시간을 계속 걸어도 멀쩡했는데 이 날은 두시간 정도 걸었는데 왜 이렇게 힘들게 느껴졌을까? 가만 생각해보니 배낭의 무게가 평소보다 좀 더 나간 것도 있을 수 있지만 그보다는 4일 간의 일정으로 산티아고를 가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발걸음이 빨라지면서 초반부터 오버페이스를 했던 것이었다. 평소와 다르게 사람들도 제쳐가며 급한 마음으로 발걸음이 빨라진 것은 분명했다. 그러면서 몸에 힘이 많이 들어가 긴장상태에서 걷다 보니 몸도 금방 지치고 머리도 아프게 된 것 같았다. 


거리가 길다고 빨리가야만 되는 것도 아닐 뿐더러 무리하지 않고 잘 쉬면서 가야 멀리 갈 수 있는 법이다. 이렇게 알고 나니 그때부터는 다시 평상시의 페이스대로 걷기 시작했고 곧 여유도 되찾게 되었다. 그러면서 안정된 느낌도 들었다. 애초에 서두를 필요가 없었는데 생각이 그렇게 미치니까 몸이 그리 움직이게 된 것이었다. 생각을 잘 해야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사건이었다.


그렇게 여유를 되찾고 걷다가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가보니 바가 있었다. 거기서 빠나다라는 것을 처음 시켜봤는데 맛이 괜찮았다. 야채도 섞여 있어 좋았다. 그것을 먹고 나니 기운도 나고 머리가 띵한 것도 점차 사라졌다. 역시 잘 먹어야 잘 걸을 수 있다는 것도 그때 느꼈다.



이때쯤 산티아고까지 남은 거리가 100킬로임을 알려주는 표지석이 나온다고 했다. 아직 발견하지 못해 혹시나 지나쳤나해서 마침 보이는 한국인 그룹에게 물어봤는데 아니라고 하여 안심이 되었다. 안내서 상으로는 이미 지나친 것 같았는데 눈으로 확인하지는 못했으니 일단 계속 가보기로 했다. 


그렇게 가다가 100킬로가 써 있는 표지석 하나를 봤는데, 뭔가 허술해보였다. 자세히 보니 매직 같은 걸로 킬로수를 써 놓은 것 같았다. 이게 표시석인가 하는 의심이 들긴 했지만 그거라도 기념으로 삼아 사진을 찍었다.



어딘가 진짜 표지석이 있었는데 모르고 지나쳤나보다 하고 생각을 할 때, 눈 앞에 뚜렷하게 100킬로가 새겨진 표지석이 나오는 게 아닌가! 그것을 보고 내가 그렇게 기뻐할 줄은 몰랐다. 앞으로 거리가 100킬로 밖에 남지 않아서 좋아한 게 아니라 그 표지석 자체가 기념비처럼 느껴져 좋아했던 것이다. 이리저리 살펴보고 사진도 찍으며 충분히 기분을 만끽하고 나서야 다시 길을 나섰다.


 

중간중간에 마을들이 나왔지만 편의시설이 없고 조그만 시골마을인 경우가 대부분이라 스치듯 지나가게 됐다. 그러다 보니 마치 지금 가는 길은 산티아고를 목적지로 하는 길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것도 그 나름대로 즐기자고 생각하며 걷다가 멀리 제법 규모 있는 마을이 하나 나타났다. 갈림길이 나와 땅길로 가는 쪽으로 가보니 곧 마을에 도착했다. 뽀르또마린이였다.




이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미뇨강 위를 다리로 건너야 했다. 이 다리와 강이 굉장했는데, 강이 넓기도 했고 강과 다리 사이의 간격이 몹시 커서 다리를 건널 때 아래를 내려다보니 후덜덜했다. 건너는 길의 폭도 좁아 큰 차가 지나갈 때면 떨어지지 않을까 절로 조심하게 되고. 대신 높은 곳에 위치한 만큼 주변 경관은 끝내줬다. 구름 낀 회색 하늘이 높이서 내려다보이는 강과 자연의 풍경과 함께 그림처럼 어우러져 있었다.





그렇게 풍경을 감상하며 다리를 건너자 그 다음에는 높은 돌계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계단씩 꾹꾹 밟아가며 올라가 문을 지나니 마을로 들어가게 됐다. 





그때가 오후 3시 경이었는데 이곳에서 머물 생각은 아니었기에 일단 보이는 성당을 구경하기로 했다. 여기 성당은 마치 성 같은 모습으로 독특하게 세워져 있었다. 



한바퀴 둘러보며 구경한 후 옆에 있는 바에 들어갔는데, 치즈 또르띠아가 맜있어 보여 시켜 먹으면서 잠시 휴식을 가졌다.



그곳을 떠나기 전에 근처 마트에서 물 한병을 사고 나오다 한국인 아저씨를 만나게 됐다. 자기는 여기에 머무는데 어디로 가냐고 물었다. 얘기를 해주니 아 그럼 매일 30킬로 이상 가는구나 하고 단정짓듯이 말을 했다. 그건 아니라고 애기해줬지만 자기 말이 맞다는 식으로 계속 얘기하길래 기분이 조금 상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 멋대로 생각하고 말하니까. 거기를 떠나 시간이 좀 지나고 생각해보니 그는 자기가 느낀 대로 얘기를 한 것이었고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하고 여기면 말 일인데 내가 그땐 그걸 고깝게 생각했다는 것을 알고 기분이 풀어지기도 했다.


마을을 떠나 다시 까미노로 들어갔을 때 오르막의 숲길이 나왔다. 숲이 길게 뻗어 있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날도 맑아져서 시야가 선명해지기도 했고.



그렇게 길을 가면서 도로 옆을 걷기도 하고 다시 숲길을 걷기도 하다가 목적지 마을인 곤사르에 도착했다. 뽀르또마린에서 곤사르까지 8.5킬로의 거리를 1시간 반만에 온 건데, 걷는데 속도가 붙어서 별 어려움 없이 올 수 있었다.






 

마을에 들어갈 때 길에서 봤던 한국인 그룹을 또 보게 되었다. 자기네는 사립 알베르게를 간다고 했다. 나는 좀 살펴보고 간다고 얘기하고 우선 공립부터 살펴보았다. 샤워시설은 괜찮았데 좀 어수선한 느낌이어서 사립도 가보았다. 이곳은 깔끔해보이긴 했지만 사람들이 꽉 차 있어서 그런지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어떤 외국인이 뭐라고 궁시렁거렸는데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괜시리 기분이 나빴다. 


그곳을 나와 잠시 고민을 하다 공립이 낫겠다 싶어 가서 등록을 하고 침대도 골라 짐을 풀었다. 빨래와 샤워까지 하고 나니 밖은 깜깜해져 있었다. 빨래를 건조기에 돌리고 밤산책을 하러 나왔다. 시골 마을이라 그런지 불빛에서 조금만 멀어지면 깜깜해졌다. 그렇게 밤공기를 느끼다 돌아와 하루를 마무리했다.



30킬로 조금 넘게 걸은 이번 여정은 초반에 오버페이스를 해서 힘들었던 것을 빼고는 괜찮았다. 먼 거리를 가려면 본래의 페이스를 가져가면서 서서히 속도를 올리는 게 좋다는 것을 몸으로 제대로 느끼기고 하고, 무엇보다 여유를 가지고 즐기면서 가는 게 나에게 좋다는 것을 알게 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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