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째 순례길. 하루하루 충실히 걸으려고 하다보니 어느덧 한달이 되었다. 그만큼 시간이 지난 것이 잘 실감이 나진 않지만.

 

오늘도 도로를 따라 길을 시작했다. 전날과 다른 것이 있다면 비가 오지 않는다는 것. 아침에 날씨가 흐린 듯 했지만 곧 파란 하늘이 보였다. 이런 하늘을 본 지가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요사이 계속 비를 봐서 그런지 오랜만의 맑은 하늘이 반가웠다. 간만에 배낭커버와 우의도 집어넣을 수 있었다.

 

 

이번 여정은 마을 간 거리가 짧아서 여러 곳을 들릴 수 있었는데, 그 중 기억에 남는 마을은 두번째로 들린 곳이었다. 산 속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의 이름은 라스 에레이아스(LAS HERRERIAS). 마치 동화 속에 나올법한 아름다운 풍경을 지닌 마을이었다. 넓은 풀밭 위엔 말들이 자유로이 뛰놀고 있었고, 시냇물은 안개를 품고 졸졸졸 흐르고 있었다.

 

 

마을 전체가 그야말로 포토존이라 한동안 머물며 구경하다가 쉼터를 발견했다. 가방을 내려놓고 스트레칭을 하다 무심코 벤치를 봤는데, 아니 이런! 작은 벌레들이 떼로 기어다니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배드버그가 있다면 저런게 아닐까 싶었다. 기겁을 하며 얼른 가방을 들어올리고 이리저리 털어내긴 했지만 못내 찜찜한 느낌은 한참 지속됐다. 아름다움을 즐기다 그런 일이 생겨 옥에 티같은 느낌이었지만 젖고 습한 나무의자에는 함부로 쉬는 게 아니라는 교훈을 얻었다. 이렇게 또 야생에서의 삶을 하나 배우게 됐다.

 

 

오전에는 길을 걸으며 계속 고도가 올라갔다. 오 세브레이로에 도착했을 때는 정오가 넘은 시간이었는데도 안개가 자욱하게 끼고 쌀쌀해져서 벗었던 내피를 다시 꺼내 입었다. 고도가 높아지면서 날씨의 변화가 심해졌는데, 안개가 자욱해서 눈앞의 풍경도 안 보이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안개가 걷히고 서서히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세브레이로
오 세브레이로

 

오 세브레이로를 떠나는 길목에 갈림길이 나왔다. 하나는 산길, 다른 하나는 도로길. 안내서에는 산길을 추천했고, 표지판은 도로길을 추천하고 있었다. 도로쪽을 보니 안개가 자욱히 피어있었는데, 그 건너 풍경이 괜찮아 보였지만 도로보단 산길이 그래도 나을 것 같았다.

 

 

그렇게 선택한 산길은 좁은 숲길처럼 되어 있어서 멀리 있는 풍경은 볼 수 없었다. 안개가 끼어 신비로운 분위기도 났지만 지나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적막했다. 괜히 이쪽으로 왔나 싶기도 했지만 기왕 선택한 길이니 즐겨보기로 했다.

 

곧 숲길이 끝나고 길이 넓어지면서 멀리 전경을 볼 수 있게 됐다. 마침 안개도 걷히면서 주변의 풍경이 보이자 기분이 나아졌다. 이때 깨달음이 나를 찾아왔다.

 

 

그동안 걸어오면서 갈림길을 여러 번 마주쳤고, 그때마다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을 가지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길이든 그 나름의 맛과 멋이 있고, 안내서에 나와 있거나 추천된 길은 하나의 참고사항일 뿐이다. 일단 선택을 했으면 거기에 집중하며 즐기면 되는 것.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한 미련이나 후회, 아쉬움 때문에 선택한 길에 집중하지 못하고 자꾸 딴생각을 한다면 현재에 깨어있지 못한 것이다. 어차피 다 경험할 수 없다면 선택을 해야 하고 물론 선택도 잘 해야 되겠지만, 그렇게 선택을 하고 난 뒤에는 집중하고 즐기면 그걸로 충분한 것.

 

정답은 없다. 본인이 선택하고 만들어가며 즐기는 것일 뿐이다. 후회와 아쉬움으로 시간을 허비하며 현재에 깨어있지 못하면 그거야말로 안타까운 일이 아닌가. 그것을 깨닫자 지난 번의 아쉬움이나 미련들이 부질없이 느껴졌고, 현재 내가 걷고 있는 순간에 좀 더 집중하게 됐다.

 

그렇게 걷다가 레온과 루고의 경계를 알려주는 표지석을 발견했다. 멋들어지게 생긴 이 표지석을 시작으로 이후 산티아고까지의 거리를 보여주는 표지들이 자주 등장했다. 점점 산티아고가 다가오고 있었다.

 

 

루고지방으로 들어서면서 길은 점점 오르막을 향해갔다. 오늘 여정이 순례길의 마지막 오르막이라 가파른 길을 올라가는 것도 기꺼이 갈 수 있었다. 고도가 높아진 만큼 풍경을 볼 수 있는 시야도 넓어졌다. 저번 레온산맥만큼은 아니었어도 이곳만의 멋진 풍경을 만끽할 수 있었다.

 

 

순례자의 동상을 지나 가장 높은 지점인 뽀이오 언덕에 오르자 이때부터는 평탄한 길이었다. 느긋하게 즐기며 걷다가 목적지인 폰프리아에 도착했다. 

 

 

폰프리아
폰프리아

 

근처에 있던 소들이 나를 쳐다보길래 나도 소들을 바라보며 서로 교감(?)을 나누다가 숙소로 향했다. 숙소의 시설이 마음에 들어 그것만으로도 행복감을 맛볼 수 있었다.

 

오늘 여정에서는 아침으로 크레페를 먹었다. 여기서는 처음 시켜본 것이었는데 맛은 나쁘지 않았지만 양이 너무 적었다. 가성비로는 꽝이었다. 입가심한 정도? 그래서 점심 때는 또르띠아를 먹었는데 그래도 배가 고파 초콜릿으로 보충해줬다. 잘 먹어야 잘 걸을 수 있는 법이니, 음식 선택도 잘 해서 허기지지 않게 걷도록 하자.

 

 

간만에 비 안 맞고 기분 좋은 햇볕을 느끼며 걸었던 여정이었다. 낼부터는 내리막길이 계속되니 무리하지 않게 천천히 내려가며 즐겨보도록 해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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