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숙 작가에 대해서는 이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고전을 연구하는 학자로, 고전의 내용을 현실과 접목시켜 우리가 살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글을 주로 쓴다는 정도? 한 때 관심이 있었다가 어느 순간 멀어졌는데, 지금 내 손에 그녀의 책이 들려 있습니다. 책의 이름은 "바보야, 문제는 돈이 아니라니까". 


이 책을 발견하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습니다. 최근 도서관을 들렀는데, 책을 빌리려고 들린 것은 아니었고, 그냥 도서관에 자주 갑니다. 도서관은 어렸을 때부터 내게 마음의 쉼터이자 놀이터이기도 했으니까요. 


어쨌든 그날도 도서관에서 빈둥대다가 책 서고를 살펴보게 됐고, 그때 이 책이 눈에 딱 들어왔습니다. 제목을 보고 꺼내기는 했지만 그보다 더 꽂힌 건 작가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궁금해졌습니다. 어떤 내용일지. 읽고 있던 책이 있었지만 진도가 잘 나가지 않은 상태였는데, 잠깐 고민하다 읽던 걸 반납해 버리고 이 책을 빌렸습니다. 그렇게 이 책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런 적이 예전에도 몇 번 있었는데요. 돌이켜보면 당시 뭔가 고민이 있던 상태였고, 그 고민을 안 채 책을 쭉 훑어보다 눈에 딱 들어오는 경험! 그 책이 실제로 고민을 해결해준 것과는 별개로 뭔가 와 닿았기 때문에 눈에 들어왔던 것 같습니다. 이번에도 그런 케이스였죠. 


원래 인문학에는 관심이 있고 지금은 관심사에서 좀 멀어지긴 했지만 고전도 마찬가지였는데, 읽어보자고 생각으로만 맴돌다 결국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전에 고미숙 작가가 쓴 책을 봤을 때 신선한 느낌이 있었습니다. 아마 나의 관심사나 가치에 부합되는 측면이 있어서인지도 모르겠지만 삶의 바라보는 방식이 와 닿는 게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번에 이렇게 다시 작가의 책을 접하게 된 것도 어쩌면 우연 같은 필연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서두가 쓸데없이 길어졌는데, "바보야, 문제는 돈이 아니라니까"는 몸과 우주의 정치경제학을 다른 책입니다. 여기서 주목한 것은 '몸'이었습니다. 정치경제학을 우주와 연관시키는 것도 독특하지만 몸과 함께 연결시키는 것은 신선하고 흥미롭게 느껴졌다. 


이 책에서 쓰고 있는 용어가 그리 편하게 다가오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는 점 미리 알려드립니다. 그리고 나누고 싶은 부분을 발췌의 형식으로 다뤄보려고 합니다.





"시간은 공간의 펼침이고, 공간은 시간의 주름이다. 시공간은 다름 아닌 우주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동양의 세계관이다. 동양에서는 사물의 시작과 끝을 묻지 않는다. 다만 '어떻게 움직이는가?'라고 물을 뿐이다."


"반면 시간과 공간이 분리되고, 세계가 논리적으로 명확한 시작을 갖게 된다는 것은 서양의 세계관이다. 그리하여 역사는 고대에서 중세, 중세에서 근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혹은 복지천국)이라는 선분을 취하게 되었다."



이러한 도입부의 설명과 함께 이야기는 사주명리학으로 넘어갑니다. '사주명리학과 생명주권' 장에는 두 개의 흐름이 나옵니다. 식상생재(食傷生財)와 관인상생(官印相生). 식상생재는 비견에서 식상, 재성으로 이어지는 라인입니다. 관인상생은 관성에서 인성, 비겁으로 이어지는 라인을 말합니다. 식상생재은 물질적 성과물로 발산하고, 관인상생은 정신적 가치의 생산으로 수렴합니다.

(참고로, 비겁은 주체성, 식상은 욕구와 재능, 재성은 일과 돈, 관성은 조직과 책임감, 인성은 공부와 지혜를 의미합니다. 이 단어들은 명리학적 명칭으로, 각 단어가 활동과 관계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정치적 성향으로 보자면 보수는 식상생재, 진보는 관인상생에 가깝습니다. 전자는 탐심(貪心)을 주로 쓰고, 후자는 진심(瞋心, 분노)을 주로 씁니다. 탐심과 진심이 뒤섞여 무명에 빠져든 것이 치심(癡心), 즉 어리석음입니다.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전자는 물질적 성과를 지향하기 때문에 결국 과잉이 문제고, 후자는 명분과 대의를 추구하다보니 뜻이 잘 모여짐 없이 여러 파로 나뉘기 십상입니다. 


그런데 작가는 앞으로 보수는 변태로, 진보는 권태로 몰락할 우려가 크다고 지적합니다. 재성이 관성으로 가는 길이 막히면 거품 혹은 잉여가 되는데, 부의 잉여는 성호르몬의 과잉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결국 쾌락과 중독으로 향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을 보면서 최근에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버닝썬 사건이 떠올랐습니다. 잘나가는 연예인이나 사업가의 부가 필요 이상으로 쌓이고, 그걸 주체하지 못하면서 쾌락과 중독에 빠져 그런 행태를 보였다고 생각하면 앞뒤가 딱 들어맞습니다. 이들뿐만 아니라 언제부터인가 상류층 인사들의 성범죄가 줄을 잇고 있죠.


진보는 계급적 전선이 분명할 때는 전투성을 발휘할 수 있지만 재성이 관성을 다 먹어 치운 형국에서는 노선의 정립이 불투명해집니다. 자본주의에는 단 하나의 계급밖에 없습니다. 부르주아이거나 부르주아가 되고자 하거나. 빈부격차에도 불구하고 욕망의 흐름은 동일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간파하지 못하면 담론의 생성이 불가능합니다.


대중이 원하는 것은 심판과 동정이 아니라 삶의 새로운 형식입니다. 정치적 상상력과 비전의 역동적 탐구입니다. 그것이 바로 관인상생이죠. 그 흐름을 타지 못하면 관성은 고이고 썩습니다. 한낱 남루한 권력투쟁에 머무를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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